'숨은 신'을 향해 던진 비참한 영혼의 파문
▲ 영화 '무셰트' 중 무셰트가 시선을 내리깐 채 성호를 긋는 장면.


“희망을 품고 사흘만 기다려라. 콜럼버스가 그들에게 말했네. 희망을 잃은 너희들에게 사흘이면 세상을 주겠다고 했네. 광활한 하늘 저 끝, 새 세상을 보려고 그의 눈이 열렸네.”

음악시간에 학생들이 피아노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한 여학생만 무표정한 얼굴로 두 눈을 내리깐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그녀는 선생님의 강압으로 억지로 노래를 부르면서도 일부러 음정을 계속 틀린다.

영화 '무셰트'(1967)는 무능력한 술꾼 아버지의 학대를 받으며 병든 어머니와 젖먹이 동생을 돌봐야 하는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사는 소녀 무셰트가 결국 절망으로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비극적인 영화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감독 로베르 브레송은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을 각색하여 모방할 수 없는 독보적인 자신만의 영화 형식으로 영원히 빛나는 예술작품을 인류에게 선사했다. 브레송 감독은 '시네마' 대신 '시네마토그래프', '배우' 대신 '모델', '영화감독' 대신 '조정자'로 용어부터 새롭게 정의내리며 아무도 내딛지 않은 길로 걸어갔다.

 

시선 대 시선, 자유의지에 의한 인간의 외적·내적 충돌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눈, 올가미를 놓는 손, 올가미에 걸려 파닥거리며 발버둥 치는 새, 올가미를 풀어주는 손의 클로즈업이 교차편집으로 보인다. 밀렵감시인의 눈과 밀렵꾼의 눈이 날카롭게 맞서는 오프닝부터 시선 대 시선이 맞붙는 인간의 외적·내적 충돌이 관계와 연결의 미학으로 그려진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론>에서 에보디우스는 “신이 모든 악의 장본인이 아닐까” 회의한다. 왜냐하면 악을 낳는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부여한 신의 의도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한 소녀 무셰트도 자신을 비참함 속에 내버려 둔 채 방관하는 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늘 시선을 내리깔고 위를 향해 진흙덩이를 던지고 흙탕물을 힘껏 밟아 더럽혀진 신발로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침울한 분위기와는 달리 경쾌하고 활기 넘치는 범퍼카 장면은 신이 창조한 우주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범퍼카들이 무질서하게 서로 충돌하다가 어느 순간 관계성이 생겨나고 시선 대 시선이 부딪치면서 자유의지가 발동한다. 항상 두 눈을 아래로 향했던 무셰트도 이 순간만큼은 환한 웃음으로 상대 남자와 시선을 맞춘다. 그러나 신의 은총 같았던 이 짧은 순간이 아버지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후 무셰트는 점점 더 악의 세계로 이끌려간다. 결국 악의 화신인 밀렵꾼 아르센에게 겁탈당함으로써 악에 완전히 잠식된다. 감독은 희망을 잃고 점점 더 악으로 물들어가는 무셰트의 시선을 집요하게 쫓으며 '숨은 신'의 존재를 은밀하게 드러낸다. 아래로 향한 무셰트의 시선은 바로 하늘에 계신 신에 대한 반항이자 거부인 것이다. 오프닝 사냥 장면과 대구를 이루는 엔딩 사냥 장면은 이제 일말의 구원 가능성도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수의를 가슴에 품은 채 언덕에서 구르는 무셰트는 이 순간 모든 자유의지를 신에게 돌려준다. 그리곤 '풍덩' 소리와 함께 '숨은 신'을 향해 파문을 던진다. 잠시 후 신은 몬테베르디의 '성모마리아의 찬가'로 회답한다.

성가(聖歌)가 끝나면 이번에는 태초의 신의 독백이 관객들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내가 없으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마음이 너무 아파. 돌이라도 든 것처럼.”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에세이스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