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청산 없이는 국민통합 불가능”

1949년 6월6일 친일경찰 습격…반민특위 와해
친일파 처벌 이뤄지지 못해 민족의 상처로 남아
간도특설대 출신 군인 일부 현충원에 묻히기도

친일세력 정치 기반 이승만 전 대통령 '발목 잡기'
소장파 의원들 남로당 프락치로 몰아 구속 '역공'

독립정신 살리는 국가정통성 바로 세우기 일환
친일 찬양·친일파 국립묘지 안장 금지 입법 구상
분단 극복에 민족적 역량 결집하는데 중추 될 것
 

1965년 생존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모인 공법단체로 설립된 이후, 이렇다할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광복회(회장 김원웅)가 친일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운동을 활발히 펼치기 시작했다. 광복회는 오는 6일 서울중부경찰서 앞에서 광복회원과 시민 등이 참가한 가운데 '반민특위 습격사건, 경찰청장의 사과를 요구하는 인간 띠 잇기' 행사를 벌인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1949년 6월6일 당시 서울중부경찰서장과 친일경찰 50여명이 헌법기관인 반민특위의 요원들을 불법연행 감금하고 반민특위의 수사서류를 폐기한 사건이다. 71년이나 지났지만 이 사건에 대한 경찰의 공식사과를 받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광복회는 앞으로 친일찬양금지법,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국립묘지 안장금지법 제정과 반민특위부활 등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김원웅(76세, 14·16·17대 국회의원) 광복회장을 만나 친일청산과 민족정기 세우기에 대한 신념을 들어봤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의 의미는

1949년 6월6일은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이다. 가슴아프고 슬픈 일 이었다. 친일경찰의 침탈로 '친일청산의 국민의 꿈'이 막을 내린 치욕의 날이다. 이날 오전 7시 윤기병 서울중부경찰서장이 긴급소집한 친일경찰들은 서울중구 남대문로 2가에 소재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김상덕)를 습격했다. 오전 8시가 되자 반민특위 및 산하 특경대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했고, 불법 연행되어 중부경찰서 유치장에 모두 33명이 감금됐다. 이 습격사건 이후, 국회에서 반민법이 개정되고 수사기간도 축소되면서 반민특위 활동은 사실상 무산됐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에게 '친일파 청산 실패'라는 큰 상처를 남기고 있다.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 심판은 그 후 다시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항일 독립운동가 조직을 소탕하는 부대인 간도특설대의 친일파 군인들은 박정희 정권 때까지 잇달아 20여명이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이들 중 일부는 지금도 국립현충원에 묻히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이승만의 반민법 반대 이유는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정부가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이후의 최대 이슈 중 하나는 친일청산이었다. 반민특위는 친일파들을 향해 역사청산 작업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 출범 초기부터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1948년 9월7일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반민법이 제정돼 정부로 이송되자 이승만은 국무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국회가 거듭해서 반민법 공포를 압박하자, 공포시한인 9월22일에야 할 수 없이 공포했다. 이승만이 반민법을 거부한 이유는 자신의 국내 정치적 기반이 친일 부호, 경찰 등 기득권 친일세력이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앞서 1945년 미군정 통치자들 역시 친일세력의 활용성 등을 이유로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않았다.

반민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기득권을 가진 친일세력은 가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반민족자를 처단한다는 자는 공산당 주구다”라며 9월23일에는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반공국민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열었다. 또한 반민특위를 지지하는 이문원 의원 등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프락치로 몰아 구속기소했다. 1949년 5월에는 이문원·최태규·이구수 의원, 6월에는 황윤호·김옥주·강옥중·김병희·박윤원·노일환·김약수 의원, 8월에는 서용길·신성균·배중혁 의원이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한 혐의로 구속됐다.

 

▲광복회의 국가정통성 세우기란

국가정통성의 중심에 서는 광복회로 발전하고자 한다. 친일찬양금지법제정,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국립묘지 안장 금지를 위한 입법을 추진하겠다. 광복회가 향후 분단 극복을 위한 민족적 역량을 결집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고자 한다.

한국사회 모순의 핵심은 '친일 미청산'이다. 해방이후 '친일 미청산'은 한국사회의 기저질환이다. 친일청산 없이는 국민통합이 불가능하다. 친일반민족 기득권세력을 그대로 받들고 국민통합을 하자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모시고 내선일체를 하자는 주장과 다름없다.

광복회는 그간 친일권력의 눈치만 보고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 왔다. 저는 독립정신을 살리면서 자주통일 국가의 완성의 기치를 들고 앞장서 나가고자 한다. 지난 10여 년간 정치를 떠난 이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 등 20여개 민족단체들이 모여 만든 '항일운동가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맡았다. 2014년 친일반민족권력의 노골적인 역사왜곡에 맞서,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출판정지가처분 신청을 했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백범이 짝지은 독립운동가 부부 장남…6·15선언 반대 당론 맞서기도

 

김원웅 광복회장은 1944년 중국 충칭시에서 조선의열단 김근수 지사와 광복군 전월선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준 인물은 백범 김구 선생이다. 김구 선생은 1942년 독립운동을 하던 30살의 김 지사와 19세의 광복군이던 전 지사의 결혼을 주선했다.

김근수 지사는 191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1935년 중국 난징에서 조선의열단에 입단해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1941년에는 광복군 제1지대에 소속돼 산시·화베이 등지에서 지하공작에 참여하며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동북지역 총책이라는 지위를 숨기고 '왕석(王石)'이라는 중국인 엿장수로 살았다.

1923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전월선 지사는 16세였던 1939년 중국의 귀주성 계림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에 입대,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군대모집 등 공작활동을 했다. 조선의용대는 이후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김원웅 회장은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대전에서 자랐다. 대전고,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6·3 항쟁에 참여하였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대전 대덕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1996년 총선에서 지역주의 청산을 내세우고 꼬마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동반 낙선한 민주당 동지들인 유인태, 원혜영, 박석무, 홍기훈, 이철, 노무현, 성유보, 박계동, 김홍신, 이수인, 제정구 등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식당 '하로동선(夏爐冬扇)'을 차렸다. 식당 대표는 김원웅, 감사는 노무현이 맡았었다.

1997년 신한국당(총재 이회창)과 통합민주당(대표 이기택)이 통합하여 한나라당이 되었다. 김원웅, 이부영, 제정구 등 통합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이 탈당·입당 절차 없이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됐다. 당시 이회창 총재는 6·15공동선언을 반대했다. 이에 김원웅은 ¨민족적 관점을 벗어난 당론에는 승복하지 않겠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회창 총재에 맞섰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역시 같은 선거구에 출마, 3선 고지에 올랐다. 국회 윤리특별위원장, 통일외교통상위원장을 역임했다. 2019년 5월, 광복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김신호 기자 kimsh58@incheonilbo.com

/사진제공=광복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