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의 즐거움으로 행복한 만남의 계기를 만들었으면 한다. 각 분야의 고수들이 CEO 학습 리더십을 응축해 지역발전을 견인하는 중심에 서길 희망한다. '교학상장'의 품격으로.

살다 보면 종종 고수(高手)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한 수 배운다. 나이, 학력과 상관이 없다. 분야를 달리 하면 특정분야의 고수를 가르칠 또 다른 분야의 고수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듯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고 가르쳤다.

학습은 일상이 됐다. 굳이 대학이 아니더라도 학습의 내용과 장소는 다양하게 개방됐다. 학습은 우리의 삶을 개척하는 불가분의 양식이다. 배우지 않고는 미래를 열 수 없다. 이미 학교교육의 교사와 학생의 구분을 넘어 멘토(Mentor)와 멘티(Mentee)의 역할이 교차하는 학습사회가 왔다. 누구나 가르치고 배우는 역할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배움의 세계는 일방적이거나 절대적이지도 않다. 가르치는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에게도 배움은 필요하다. 배움은 가르치거나 배우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양면성이다. 오경(五經)의 하나로 분류되는 예기(禮記) 학기(學記)편에서는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를 성장시킨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을 제시하고 있다. 옥을 쪼고 다듬어야 그릇을 만들 수 있듯이 지도자가 되려면 반드시 가르치고 배우는 학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CEO 학습 리더십이 기업경영에서 강조되는 이유다.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어도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 수 없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 학문을 해야 지극한 바른 이치의 위대함도 깨달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배우고 나면 부족함을 알아 반성할 수 있고, 가르쳐 보면 비로소 어려움을 알아 스스로를 단련시키게 된다. 스승은 가르치며 성장하고, 제자는 배움으로 큰다고 한다. 결국 가르침과 배움이 서로를 성장시킨다는 논리다.

서경(書經) 열명(兌命)편에도 '사람은 모름지기 시종일관 배우는 것에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상호 성장은 멘토와 멘티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 이타이카 왕국의 왕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아들 텔레마코스를 친구 멘토르에게 맡겼다. 아들은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하게 된다. 보호자, 상담자, 스승,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을 멘토라고 지칭하게 됐다.

학습사회는 멘토를 열망한다. 영화 '일 포스티노'(우편집배원, Il Postino)에도 멘토와 멘티의 역할이 등장한다. 칠레의 저항 시인,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파블로 네루다는 추방당해 이탈리아의 작은 섬 칼라 디소토로 온다. 그는 자신에게 이탈리아의 풍광을 들려준 일자무식 우체부 마리오를 시인으로 변모시킨다. CBS 음악FM의 영화음악 프로그램에 종종 주파수를 맞추곤 한다. 영화 '일 포스티노'의 OST가 잔잔하게 파도치듯 시그널 뮤직으로 흐를 때면 영화 속 감동 스토리가 애잔한 아코디언 연주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일면 우리 사회가 전통적인 교육 패러다임에 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 제공자에서 수용자로 고착된 비가역적 모델은 아닌가. 인간은 스스로의 배움 역량에 따라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게 된다. 인간은 탄생할 때부터 의존하지 않고는 생존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무기력의 생물학적 존재다. 하지만 우리는 배움이라는 잠재력을 발휘하고 성장한다. 더욱이 죽는 순간까지 학습과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노년의 학습이 풍요로운 노후를 담보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위기에 봉착했을 때 학습 현장에서 만난 지식과 정보, 동료 의식이 기업 재기의 물꼬가 됐다는 L대표이사는 최근 생산라인을 확충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과 조직의 발전을 도모하면서 타인의 직업과 연결하고, 의사소통을 통해 조화로운 사회를 위해 함께 배우고 나누었다고 한다. 위기와 리스크에 대응하는 방안을 터득한 셈이다. 주경야독으로 자격증과 학위를 취득한 K후배도 있다.

학습의 즐거움으로 행복한 만남의 계기를 만들었으면 한다. 각 분야의 고수들이 CEO 학습 리더십을 응축해 지역발전을 견인하는 중심에 서길 희망한다. '교학상장'의 품격으로.

 

논설주간

문화경영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