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23년 6월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수많은 무용담을 써내려간 1세대 전쟁영웅이지만 병영에 누워서 사열을 받을 만큼 완연한 환자였다.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말라리아, 장티푸스, 웨스트나일바이러스, 췌장염 등 여러 설이 대두되었다. 냉혈한인 그는 삶 전체가 살육과 파괴로 물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칠 줄 모르는 정복욕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사람을 셀 수 없을 정도다. 36세 요절이 많은 생명을 구한 셈이 됐다.

1300년대에 대유행한 페스트(흑사병)는 이미 6세기에 아프리카에서 발생했다. 대륙과 대륙 간 활발한 교역이 페스트 확산에 작용했는데, 542년 이집트 나일강에서 출발한 화물선에 숨어든 페스트균은 로마, 마르세유, 스페인 등으로 며칠 만에 진출했다. 당시 페스트는 선페스트, 폐페스트, 패혈성페스트로 분류되는데 이 중 폐페스트가 지금의 코로나바이러스와 흡사하다. 기침이나 재채기를 통한 비말(침방울)감염 방식으로 전이됐다고 한다.

1300년대 페스트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일으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은 자들은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호전됐다. 농부나 수공업자들은 유리한 위치에서 지주 등과 협상할 수 있었고, 식량부족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한 세기 내내 죽음의 그림자에서 허덕였지만 유럽은 결국 페스트에서 벗어나 사회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원인조차 모른 채 죽어간 민초들의 희생 대가라는 측면이 있어 씁쓸하다.

천연두가 수 세기에 걸쳐 끼친 피해는 막대한데 20세기에만 약 3억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행여 살아남더라도 후유증인 '마마(곰보) 자국'은 처녀들에게 재난이었다. 1500년대에 유럽의 탐험가나 정복자들에게 천연두는 유용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불과 600여명을 병사를 이끈 코르테스가 남미 아스테카 문명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멕시코 원주민(인디오)들이 천연두로 대거 사망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생물전이었다. 한 병사는 다음과 같은 목격담을 남겼다. “가옥과 논밭, 거리의 광장이 시체로 가득찼다. 인디오의 시체를 밟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스페인의 정복자 피사로는 1532년 234명의 병사만으로 감염성 질환과 내전으로 이미 초토화된 잉카 제국을 단숨에 제압했다. 남미 제국들은 사실상 전염병으로 무너진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980년 5월8일 천연두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퇴치되었음을 선포했다. 비극으로 얼룩진 천연두 역사를 종식시킨 날이다.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