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아파트 천민'
[썰물밀물] '아파트 천민'
  • 정기환
  • 승인 2020.05.25 18:14
  • 수정 2020.05.25 18:09
  • 2020.05.26 경기판 11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94년 11월의 어느 날. 서울 남산 기슭에서 큰 구경거리가 벌어졌다. 남산외인아파트를 스위치 한번 눌러 폭파시키는 이벤트였다. 정오가 되자 멀리 섬광이 한번 번쩍이더니 고층아파트 몇 채가 굉음을 울리며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일요일임에도 불려 나온 서울시 출입기자들은 자녀들까지 데리고 나와 그 진풍경을 선물인양 함께 구경하기도 했다. 1972년 그 아파트를 지었던 초대 대한주택공사 총재도 현장에 나와 있었다. 소감을 물으니 그냥 눈물만 글썽였다. 당시 YS 정권의 전매특허 '역사 바로 세우기' 시리즈 중 하나였다. 그 해 광복절에는 중앙청도 그 비슷하게 사라졌다. 그런데 그 무렵을 전후해 성수대교도, 삼풍백화점도 요란하게 무너져 내렸으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나라 아파트 역사의 한 해프닝이었다.

▶아파트의 역사는 2000여년이나 된다. 고대 로마의 대지주들이 서민에 임대하기 위해 지은 '인슐라'가 그 기원이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기에 근대적 아파트가 등장했다. 공장과 도시로 밀려드는 노동자들의 주택난 해소를 위해서였다. 20세기 들어 구소련 등 공산국가들도 아파트를 많이 지었다. 그래서 유럽_미국 등에서는 여전히 아파트를 서민주택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도입 초기부터 선망의 대상이 됐다. 아들딸이 도시로 나가 아파트 하나 장만하면 자랑거리였다.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이나 '타워팰리스 신화' 등도 그런데서 비롯됐다. “모든 국민이 다 강남에 살 필요는 없다”는 유명한 발언도 그렇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연탄을 때는 아파트가 많았다. 일요일이면 가구마다 한 사람씩 나와 계단 물청소를 같이 하고 막걸리를 나누곤 했다. 평당 분양가가 치솟을수록 아파트촌 문화가 삭막해져 간 느낌이다. 경비원들이 철통같이 지켜주고 현관 바로 앞 청소까지 관리사무소가 다 해준다. 곳곳에서 거액의 관리비 유용 시비가 벌어지고 난방비 비리 관련 '난방 열사'까지 배출됐다.

▶언제부턴가 '아파트 갑질'이 고질화 되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과 부천에서 경비원과 관리소장이 주민 갑질에 극단의 선택을 했다. 용인에서는 주민이 택배 일을 나온 청년들을 마구 폭행했다. 수년 전에는 한 여름인데도 '택배원 엘리베이터 사용 금지'를 내건 야박한 고가 아파트도 있었다. 아침 출근길에 경비 아저씨들이 부동자세로 거수 경례를 하도록 하는 일부터 추방해야 할 일이다. 대부분 평생 일을 하고도 다시 일을 잡으신 분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한심하기 짝이 없는 갑질들이라니, 참으로 '아파트 천민'이라 할 것이다. 그런 소문이 난 아파트단지와는 사돈도 맺지 말 일이다.

 

정기환 논설실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