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딸이 태어나면 심었다는 오동나무도 보라빛 꽃을 피우는 5월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김춘수의 시 〈꽃〉) 그런데 인간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정의'라는 가치어가 그렇다. '정의'라고 불러대기 시작하면, 오히려 그 반대의 모양새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광주 5·18 비극의 뿌리였던 민주정의당이 대표적이다. 아마도 태생부터 '정의'가 워낙 결여돼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낭패를 본 정의당도 그렇다. 늘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더니 지난해엔 '조국 수호'에 가담해 시쳇말로 좀 '깬' 느낌을 주었다. 요즘 한창 지면을 달구고 있는 정의기억연대도 '정의' 항렬의 단체다.

▶친구끼리의 친목계에서도 거두는 돈, 쓰는 돈을 '공금'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엄중히 대하고 삐끗했다가는 모임 자체가 깨져서다. 이달 초 일본군 위안부 고발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실존 인물인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했다. “수요집회에서 받은 성금이 할머니들한테 쓰이지 않고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겠다.” “30년간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 그런데 정의기억연대측의 반박이 더 놀라웠다. “세상 어느 NGO가 활동 내역을 낱낱이 공개하고 세부 내용을 공개하느냐.” 모든 걸 떠나 그런 식의 항변 자체가 너무 비상식적으로 들렸다. 친구들 모임의 총무가 “회비를 어떻게 쓰든 알아서 뭐하게.”라고 했다간 어떻게 될까. 그 할머니에 대해서는 “기억이 달라져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내심으로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지가 금방 전해져 왔다. 불투명한 기부금 관리의 비판에 대해서는 “친일 세력의 음모”라고 쏘아부쳤다. 그 순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움찔했을까.

▶그런데 안성 산골 부동산 사고 팔기 등에 가려 정작 놓치고 가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지난 8일 이후 이용수 할머니가 누누히 강조하시는 얘기다. “학생들이 (수요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귀한 돈과 시간을 쓰지만 증오와 상처만 가르친다.” “올바른 역사 교육을 받은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친하게 지내면서 대화를 해야 문제가 해결된다.” “내가 툭 털면 우리나라가 좀 힘있게 안 살겠나. 한일 서로간에 친하게 지낼 수 안 있겠나.” “일본이 우리에게 미운 짓을 했지만 코로나로 고통받는 것은 별개”라며 일본에 기부하기 위해 모아 온 마스크 수백장도 보여줬다. 일본이라면 철천지한을 품으셨을 위안부 피해 당사자의 말이다. 연세가 있으시니 우리 사회에 건네는 유언으로 받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마저도 '친일'이라 매도할 것인가. 그러면 답이 없다.

 

정기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