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기영 시인을 처음 만난 때가 13년 전이다. 너그럽고 맑은 눈빛을 지닌 그가 시집이 새로 나왔다며 <갈잎나무 숲의 소나무>(월간문학)라는 시집을 건넸다. <갈잎나무 숲의 소나무>를 찬찬히 읽어가면서 나는 시인 김기영의 삶과 문학을 단편적이나마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오로지 시에만 몰두하려고 평생 업으로 삼아왔던 교사직까지 내던진 터였다. 나는 그의 시에서 김기영 시인 자신의 운명이 '시'와 조우하는 것임을 증명하려고 하는 명징한 언어의 세계를 보았다.

이후로 나는 인천의 문학 행사에서 김기영 시인을 몇 번 마주치고 반갑게 나누곤 했으나 술 한잔 대접해드리지 못 해 드린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런데 시간은 덧없는 것인가? 13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내 삶을 격랑의 한가운데에 띄워놓은 멍텅구리배처럼 내던져놓은 채 문학을 잊고 있었다. 돛과 노도 없이 바람과 물살에 떠가는 폐선박처럼 나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리곤 다시 고향 인천으로 돌아와 닻을 내리고 근근이 먹고 사는 중에 김기영 시인의 뒤늦은 부고를 들었고,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암 그후의 삶>(CLC)라는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

<암 그후의 삶>은 고 김기영 시인이 췌장암과 싸우면서 겪은 암 투병기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투병기는 결코 아니다. 이 책에서 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권사직을 맡으며 삼과 운명을 절대자에게 맡겨놓으며 살아왔던 그의 세계관,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이 담담히 녹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암과 맞서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삶의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아름다우면서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암이 발견된 이후부터 암 수술 과정과 치료와 완치 판정을 받기까지 과정에서 자신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심경의 변화 상태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절대자에게 맡겨놓으면서도 자신을 객관화하고 가족과 주변인들의 삶을 어루만지고 있다.

시인은 과거 기자에게 전해준 시집 <갈잎나무 숲의 소나무>에서 존재와 그리움의 경로를 밟아가며 주어진 생의 시간들을 향하는 발걸음들을 시를 통해 보여주었었다. 어쩌면 <암 그후의 삶>은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의 연장선이기도 한 것이다.

"살려고 열심히 투병 생활을 하다 보니 불안한 조급함과 외롭고 슬픈 삶이 몹시 서러웠습니다. 소중한 물건을 빼앗긴 것처럼 허탈했습니다. 차츰 우울감에 빠져들었고 세상이 저를 가혹하게 학대하는 것처럼 원망스러웠습니다. 초라한 삶을 더 이어가 보았자 안타까워할 사람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끝없는 절망, 눈물로 점철되는 고뇌들, 이 고통과 고독을 어찌할 것인가?’ 11쪽)라는 자기 고백을 통해 나약한 인간 존재로서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의 자기 성찰은 보잘것없는 존재로 사는 삶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또 이렇게 고백한다.

"또 현재 나는 다른 사람보다 위가 5분의 1 정도 작다. 종전보다 소량의 식사를 해야 한다. 쓸개도 없다. 담즙이 나오지 않으니 소화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 자세히 모르겠다. 어머니도 쓸개를 절제하고 오랫동안 사셨다. 나는 십이지장도 작다. 췌장 머리 부분에 암이 발생했기 때문에 가까운 부분은 모두 잘라냈다. 앞으로 식사량, 식사 방법 모두 바꿔야 한다. 소식, 빈번한 식사, 맵고 짜고 기름진 음식은 피하기, 금주는 물론이고 담배도 피우지 말아야 한다."

"수술하고 나서 한 달쯤 되었다. 방사선 치료와 항암 주사를 맞으러 주 2, 3회 병원엘 다녀오고 그렇지 않은 날은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가 수술을 받았지? 왜 살아야만 하는가? 무엇 때문에 살려고 하지? 왜 세계는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불행한 사람이 있는가? 나의 삶은 의미 있는 것인가? 이러한 비참함을 겪고도 살아가야 하는가? 자살하는 사람들이 죽을 때 유서에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남기고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니 왜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걸까?"(142, 143쪽)


이처럼 나약함에 대한 자기 연민과 고백을 토로한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유약함이란 약함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의 유약함이란 잠재적인 것이며, 긍정적인 것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것을. 문득 고 김기영 시인이 "시리게 맑은 하늘에 철새의 목울음 자아질 무렵/찬란하던 영화는 땅에 떨어져 짓밟히고/고추바람과 맨몸으로 사투를 벌인다"라고 시 '바람은 갈잎나무 숲의 소나무를 맴돌고'에서 토로한 고백이 떠올랐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절대자에게 채무처럼 떠맡긴다. 그러나 절대자에게 의탁하는 것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의 실존으로서의 의탁을 행한다.

"내가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나를 이 지경까지 만드셨냐고 하나님을 상대로 원망했다. 그땐 그저 생명의 애착 때문에 찬송가 471장 '주여 나의 병든 몸을'을 울며 불러댔다. 많은 사람이 정신적인 문제와 마음의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나는 특히 영적 문제로 방황하고 있었다. 어떤 치유부터 시작해야 할까? 치유의 시작은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는 것부터 시작하자. 나만의 삶의 계획을 세워 찬송, 기도,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으로 위로받는 시간이 되게 해야겠다. 정시기도를 통해 과거를 넘어서는 힘을 얻고, 수시기도를 통해 현재 삶 속에서 사탄과 싸워 승리하고, 집중기도를 통해 미래를 넘어서는 영적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겠다."(293쪽)

그렇다.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자신만의 삶의 계획을 세운 것이다.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세계를 올곧이 세우려 한 것이다.

"조형, 사람은 행주와 멸치 같은 신세야. 하찮은 존재, 나중에 버려지는 이 존재에 대한 응시는 인간들이 때에 따라선 멸치도 되고 행주도 되기 때문에 비롯된 거야. 나는 그런 사람이야. 그래서 시를 쓰는 거야."라고 내게 건넸던 그의 말이 떠오른다.

고 김기영 시인은 인천 용유도에서 출생, 인천교육대학교(현 경인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30여 년간 교편을 잡았으며, 1991년 문단에 등단하여 인천문인협회 이사 및 시분과 회장, 인천 남동구 문화예술회 부회장 및 문학분과 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성산문학회, 인산문학회 등 다양한 문인 활동을 했다. 그 외 국립인천대학교 평생교육원, 남동구청 공무원문학회, 주민자치센터 등 다수 기관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근정포장증(2000), 제10회 순수문학 본상(2002), 제27회 인천시문화상(2009) 등을 수상하였고, SBS 컬처클럽 ‘예술家예술人’ 코너에 시와 활동 내용이 소개되었다(2012. 11. 10. 102회 방송). 췌장암 수술(2011. 9. 12.)을 받은 후, 힘든 투병 생활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여 완치 판정을 받았다(2016. 9. 15.). 서창교회 권사로 신앙생활을 하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2019. 3. 26.)하였다. 저서로 개인시집 『갈잎나무 숲의 소나무』(2007) 외 5권, 동인시집 『또 하나의 원을 그리며』 외 4권을 출간하였다.


<목 차>

서시

전화위복

프롤로그

통절한 반성문

제1장 입원

1. 병실 창가에서 | 2.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 3. 발병과 췌장암 판정 | 4. 수술 전야 병상에서(2011년 9월 14일 수요일) | 5. 친절한 말씀 한마디 | 6. 사랑의 도반(道伴) | 7.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제2장 믿음

1. 간절히 소망하는 기도 | 2. 믿는 대로 된다 | 3. ‘부활신앙의 은혜’를 받다 | 4. 처음 교회에서 안수를 받다 | 5. 새벽기도회에 나가다 | 6. 나는 왜 영어

성경을 필사하였는가 | 7. 기도하는 손자의 모습을 보며

제3장 힐링

1. 비 오는 숲 | 2. 슬픔도 힘이 된다 | 3. 랜디 포시의 『마지막 강의』를 읽고 | 4. 나도 활기차게 걷고 싶다(손주에게 쓴 편지) | 5. 나는 영양실조로 죽지 않는다 | 6. 암환자의 식성에 대하여 | 7. 바이러스야 없어져라 | 8. 이 낯가

림을 어찌하나 | 9. 나는 암을 이렇게 극복했다 | 10. 암을 이겨내는 사람들의공통점은 뭘까

제4장 소망

1. 물반지 | 2. 우울증, 이 아름다운 세상에 | 3.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 4. 머리맡에 있는 그림자 | 5. 내가 이대로 죽는다면 | 6. 불안한 나날 | 7. 삶을 정리 하자 | 8. 미지생 언지사 | 9. 나는 잠시 이름만 올려놓았을 뿐 | 10. 표사유피 인사유명(豹死留皮人死留名) | 11. 전화위복으로 삼자

제5장 향수(享受)

1. 서창로(西昌路)를 걸으며 | 2. 육체적 고통은 기도로, 정신적 고통은 예술로 | 3. 왜 예술 치료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 4. 시는 고요한 예술 | 5. 잠들기 전에 여러 마일을 가야만 한다 | 6. 누런 책 중간에서 성현을 대하다 | 7. 삶

의 의욕과 용기를 준 책들 | 8. 저 푸른 수평선을 너머 | 9. 복음을 선포하는 예술 | 10. 색채의 언어

제6장 관계

1. 한가을 | 2. 글월로 보내는 정 | 3. 정겨운 반세기 | 4. 입지적인 삶 | 5. 두꺼운 종 | 6. 생명의 동영상 | 7. 할아버지의 횡설수설(1) | 8. 할아버지의 횡설수설(2)

에필로그

빼앗긴 시간을 어찌 채울 것인가

후기

아들이 아버지를 기억하며 | 아내에게

<추천사>

13세기의 대시인 단테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고독과 슬픔을 대서사시 『신곡』으로 승화시켰다. 고(故) 김기영 권사님의 유작 『암 그 후의 삶』은 췌장암의 절망과 고뇌 앞에서 구원자 하나님을 깊이 만난 고백의 서사시다.… 글을 읽는 내내, 생전의 권사님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소박한 웃음 가득한 티 테이블에 앉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인문학적인 친구들을 많이 남겨 두고 가셔서 아직도 티 테이블의 찻잔에 모락모락 온기가 남아 있다. 이 티 테이블에 여러분을 기쁨으로 초대한다.

유영준 목사 / 서창감리교회 담임

‘암 그 후의 삶’은 암 투병기지만 남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암으로 인해 기독교신앙을 갖게 된 영적인 체험 과정을 진솔하게 묘사했다. 따라서 독자들은 질병 여부와 상관없이, 영혼을 변화시키는 신앙의 놀랍고 위대한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나아가, 암을 극복하기 위해 저자가 읽은 동서양 고전의 독후감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통해, 역사에 빛나는 현인들의 보물 같은 지혜를 얻을 것이다.

김완수 박사 / 영문학, 시인

/조혁신 기자 mrpe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