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단장한 제물포클럽 개회식을 6월22일(토요일) 오후 4시30분에 가졌다. … 모두 건물 내부의 멋진 방과 시설들을 둘러본 후, 영국 영사인 허버트 고페씨가 훌륭한 서비스를 언급하고 클럽 빌딩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다. … 대단한 감격 속에서 새로운 이 사업을 위해 모두 축배를 들었다. … 클럽 건물은 좋은 전망에다 넓은 당구장과 독서실, 그리고 근처에 테니스장을 갖추고 있어 성장하는 제물포 사회의 색다른 장식을 선사했다. 클럽 건물이 오래도록 물결치듯 활동하기를!”-, 1901년 6월호.

는 1901년 1월부터 1906년까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간행된 월간 잡지다. 한국에 선교를 하기 위해선 한국 사회를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발간됐다. 한국의 현상들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한국의 정치·경제·외교·사회·문화·민속·각국과의 이해관계 등 다방면에 걸쳐 외국인의 눈에 비친 견해를 밝혔다. 한 나라에 선교를 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강조하는 관점에서,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이 잡지 말고도 란 월간지(1892년 1월~1898년 12월)가 있다. 민간 영역에서 이러니, 국가 차원에선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조선에 대한 외국의 침탈 전략이 무섭다.

제물포구락부(클럽의 일본식 발음·중구 송학동)는 근대유적지 중 하나로,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제 제17호이다. 1884년 조선 판교섭통상사무 김홍집과 각국 대표가 인천제물포 각국 조계장정에 서명하면서 제물포 일대에 조계지가 조성됐다. 이어 1901년 조계 당사자들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비공식 외교 활동을 벌이려고 사교 모임인 제물포클럽을 만들었다. 러시아 출신 건축가 사바틴이 2층 벽돌 건물로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본디 조계지에서 일을 하는 이들이 사적으로 모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일본 대표들이 서양 대표들과 어울리지 못하면서 서양인 전용시설로 바뀌었다고 한다. 당구장·독서실·테니스장을 갖췄고, 아래 한옥 터엔 일본인 사업가 별장이 있었다. 해방 이후엔 미군 장교들이 클럽으로, 대한부인회 인천지회가 사무실로 이용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거의 다 무너진 중구 내 근대건축물 중 살아 남은 건물로 꼽힌다. 1952년 7월 이후엔 인천시의회, 인천시교육청, 인천시립박물관 등으로 사용됐다고 전해진다.

인천시가 38억여원을 들여 제물포구락부 인근 지역 사유지 매입에 나섰다. 해당 부지는 중구청과 자유공원 사이로, 제물포구락부와 인천시 역사자료관 바로 옆이다. 시는 이들 개항기 건축물과 연계해 `역사낭만 산책' 공간을 조성할 방침이다. 구락부 주변 문화재생 사업의 일환이라고 한다. 큰 사업비를 투입하는 만큼, 전시·문화 공간과 함께 시민들이 여유롭게 노닐 수 있는 쉼터를 마련했으면 싶다. 시민 누구나 찾아 둘러볼 수 있는 `열린 공간'이 기본 방향이지 않겠는가.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