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5 총선을 앞두고 후보 단일화가 대부분 무산됐다. 역대 선거에서도 그랬듯이 단일화는 정치인들에게 풀기 어려운 복합 방정식이다. 경남 창원 성산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이흥석 후보와 정의당 여영국 후보는 7일 단일화 협상 중단을 선언하고 서로 상대에게 책임을 돌렸다.

인천 연수을의 경우 정의당 이정미 후보는 단일화에 적극적이었지만 민주당 정일영 후보는 외면했다. 단일화가 일찍이 거론된 인천 미추홀을 지역구의 미래통합당 안상수 후보와 무소속 윤상현 후보는 고발전을 펼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 구로을에 출마한 통합당 김용태 후보와 강요식 무소속 후보는 지난달 27일 단일화 합의를 했지만, 잉크도 마르기 전에 결렬됐다.

대표적인 단일화 실패 사례로 회자되는 것은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다. '6월 항쟁' 결과로 이뤄진 직선제였기에 야권의 승리가 당연시됐지만,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와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가 관건이었다. 학생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이뤄진 선거였기에 단일화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양김은 서로 상대의 양보를 요구하며 버텼다. 불안해진 재야단체들이 단일화를 강하게 촉구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럼에도 선거 전날까지 "극적인 효과를 보기 위해 단일화를 늦춘 것이지 결국은 한 사람이 양보할 것"이라는 희망이 나돌았지만, 순진한 범부들의 생각이었다.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승리했고 김영삼 28%, 김대중 27%였다. 민주화 투쟁을 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준' 꼴이 됐다.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이때부터 본격화됐다고 해도 그다지 큰 과언은 아니다. 후폭풍은 바로 나타나 김대중은 선거 다음날 새벽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최종 검표 결과가 나오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양김의 정치생명은 질겼다. 김영삼은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공화당 3당 합당을 통해 1992년 대통령이 됐고, 정계은퇴를 번복한 김대중은 1997년 뜻을 이뤘다. 시중에서는 "대통령이 되려면 독해야 된다"는 얘기가 나왔다.

정치인들에게 단일화=(나로) 단일화를 의미한다. 설사 테이블에 앉아도 동상이몽이니 협상이 될 리가 없다. 마지못해 단일화는 했지만 뒤끝이 안좋아 망신당한 사람들도 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과 단일화했지만 선거 전날 밤 지지를 철회한 정몽준 전 의원, 2012년 대선 때 문재인과 단일화했지만 지원유세에 소극적이다가 선거날 아침 미국으로 떠나 구설수에 오른 안철수 전 의원이다. '내가 양보할게'는 범부나 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말이다.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