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조국의 봄 되찾고자 농민들을 일으키다

 

 

 

▲ 김수민 의진의 의병활동지.

 

 

 

▲ 의병 활동이 번성했던 임진강 최고의 나루터 고랑포(1930년).

 

 

경기도 장단 출신…1907년 의병 조직화
'2000명 의진 이끈 명장 중의 명장' 기록'
국가 소유 대·소포로 무장해 투쟁 전개
어려운 농민 상대 민폐 엄금했던 '의인'

◆ 김수민 의병장은 어떤 분이었나?

"김수민(金秀敏)은 경기도 장단(長端) 출신이다.그는 농촌 출신으로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였기 때문에 관헌으로부터 동학당으로도 지목을 받아왔다. 그는 힘이 남달리 세고 사격술이 뛰어나서 백발백중하는 기술이 있었으며 화약과 탄환까지 스스로 제조할 줄 알아 그의 휘하에는 많은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봉건적 수탈에 항거하던 그가 일제의 농민 수탈이 심화되어 가고, 이어서 1907년 군대 해산이 감행되자 일련의 농민운동을 조직화시켜 항일운동으로 전환하여 발전시킬 것을 결심하였다.1907년 10월 2일(음력 8월 25일)에 그가 살고 있던 장단군 북면 솔랑리(率浪里)에서 의병 모집을 착수하였다. 그는 군부 소관의 대포를 빼앗아 무장하고, 덕음동을 거점으로 군량을 적취하고, 보부상을 모집하여 정보대를 편성시켜 원근의 적정을 탐색하도록 할 뿐 아니라 산악 전투에서 의병을 보호할 수 있도록 의병 복장을 염색하여 입게 하였다. 그리고 민폐를 덜기 위하여 부호의 양곡과 의복을 징발하여 군용에 충당시켰다. 이렇게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구성된 농민의병은 일찍이 을미의병 때 신돌석(申乭石)·김운로(金雲로)의 의진에서 비롯되었지만, 김수민·안규홍(安圭洪)의 정미의병에 이르러서 본격화가 가능하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권. 536쪽)

김수민(1867~1909) 의병장의 본적과 주소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면, 1986년 <독립유공자공훈록>이 처음 나왔을 때는 경기도 장단 출신이라고 했다가 최근 국가보훈처 전자사료관에는 본적이 경기도 고양군 하도면 소화전리(小花田里)이고, 주소는 장단군 북면 솔랑리(率浪里)라고 수정하였다.

그러나 2017년 '이달의 독립운동가'(8월)로 선정하고 그의 공적을 정리한 글에는 "장단군 북면 솔랑리의 양반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농민이었다"로 기술해 놓았다.

이를 살펴보면, 김수민 의병장이 피체되어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공소하여 경성공소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전자에는 주소·본적을 밝히지 않고 경기도 고양군 하도면 소화전리로 되어 있지만, 후자에는 장단군 북면 솔랑리로 되어 있는 데서 생긴 오류이다.

김수민 의병장은 서울진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가 실패하고, 인력거꾼으로 변장하여 서울에 잠입하여 1개월 동안 머물다가 다시 경기도 고양군 화도면 소화전리로 왔다가 피체되었기에 당시 주소는 고양군 하도면 소화전리였고, 본적과 의병을 일으킬 당시 주소는 장단군 북면 솔랑리였다.

국가보훈처 전자사료관에 나오는 본적과 주소는 서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김수민 의병장의 신분을 살펴보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였기 때문에 관헌으로부터 동학당으로도 지목을 받은 평민"이라고 했다가 양반이라고 수정하였다.

"김수민은 경기도 장단(長端)사람이다. 그는 힘이 세고 사격을 잘하여 백발백중이었으며 자신이 탄약을 제조하고 사용하였다. 13도총도독(十三道總都督)이 되어 의병 2천명을 거느리고 장단의 덕음동(德蔭洞)에 웅거하여 군량을 저축하고, 보부상들을 모집하여 정찰대로 삼아 원근에 배치하였다." (박은식 저·남만성 역, <한국독립운동지혈사>. 59쪽)

1970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독립운동사> 1권 '김수민 의병부대' 편에서 "일찍이 동학혁명군 측 입장에서 활약하여 관헌으로부터 동학당 지목을 받아 오다가 1907년에 기의하여 13도총도독이 되었다"고 정리하였다.

이어진 각종 글에서 그는 '힘이 세고 사격을 잘하여 백발백중이었으며 자신이 탄약을 제조하고 사용했다.'고 기술하였으며, 최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적을 정리한 글에는 "그는 일본에 의한 경복궁 점령 이후 제2차 동학농민운동에서 적극적으로 농민군에 가담하여 국왕을 위협하고 국권을 침탈하고 있던 일본을 상대로 싸웠으며"라고 기술하여 의병 성격이었던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원조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물론,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그 어떤 책이나 문서에도 김수민 의병장이 이른바 '동학당'이라 할 수 있는 근거가 없고, 그가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근거도 없다.

문석봉(文錫鳳)의 <의산유고(義山遺稿)>, 이회원(李會源)의 <동비토론(東匪討論)>, 이두황(李斗璜)의 <우선봉일기(右先鋒日記)> 등에 등장하는 '김준수'는 모두 호서·호남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가 피체되어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은 기록에는 '전직 주사 출신의 양반'으로 나타나 있다.

1902년 1월 6일(양력 2월 14일) <승정원일기>에는 "전화과주사(電話課主事)에 김수민(金秀民)을 임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동일 인물인지 알 수 없으나 그는 190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13도창의대진이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할 때 이인영(李麟榮) 총대장으로부터 '지방안무(地方安撫)'라는 칭호를 받고 안무장(安撫將)·총도독(總都督)으로 활약한 기록으로 보아 양반계열의 신분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대·소포로 무장하여 의병투쟁에 나서다

김수민 의병장은 1907년 10월 2일(음력 8월 25일) 경기도 장단군 북면 솔랑리에서 국권회복(國權恢復)을 도모하고자 인근의 산포수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거의하였다.

의진의 전모는 파악할 수 없으나 <독립운동사> 제1권에는 2000여 명의 의병을 이끈 명장 중의 명장으로 기록했는데, 일제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300~900여 의병으로 구성된 의진을 형성하고, 좌익장에는 전복규(全福奎), 척후장에는 김오룡(金五龍) 등의 명망가였고, 선봉장은 동생 김백수(金白洙)였으며, 허위(許蔿) 의병장이 참모장을 맡았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김수민 의진은 개성군 대흥산(大興山)에 소재한 대흥산성 창고(무기고)에 보관 중이던 정부 소유의 대포 30문과 소포 150문을 탈취하여 무장하고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는 것은 그에 대한 재판기록을 비롯한 일제의 기록 <통감부래안>에 드러나 있고, <폭도에 관한 편책>에는 김수민 의진에서 숨겨둔 일부 대포와 장탄기(裝彈器)를 압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4월 26일(1908년-필자 주) 이구치(井口) 경찰대와 합하여 장단군(경성을 거하기 북방 약 12리:우리식으로는 120리. 약 48㎞-필자 주) 소랑리(小浪里:솔랑리率浪里의 오기-필자 주)의 소탕을 행하여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김수민이 매닉(埋匿)한 좌의 무기를 발견, 압수하였다.
1. 조선 고식 대포(청동제) 10문
2. 장탄기(철제) 249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권. 440쪽)

김수민 의병장이 토굴에 숨겨둔 대포는 그가 순국한 후에 발견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매천야록>에도 실려 있다.

"효종 때의 대포 발견

일병들이 장단의 어느 토굴 속에서 대포 3문을 발견하였다. 그 길이는 4척 5촌이었으며, 중량은 15관으로 낙관(落款)이 찍혀 있었고, '監官 申起立, 匠人 金愛立, 淸 康熙 十六年'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은 우리 효종 시대의 것으로 대흥산성에 간직해 두었던 것을 그 후 우리나라 장군 김수민이 소유하였다가 그 병대가 패배한 후에 그곳에 묻어 두었다고 한다." (황현, <매천야록> 제6권, 1910년)

김수민 의병장은 의진을 장단군 덕음동(德蔭洞)으로 이동시켜 군량을 비축하였고, 보부상들을 모집하여 정보대를 편성하여 주변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일본 군경의 동향을 염탐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의병들의 옷은 송백(松柏)의 색으로 염색하도록 하였고, 군용품은 부호로부터 양곡과 의복을 징발하여 충당하였으나 어려운 농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엄금하였다.

▲이태룡 박사
▲이태룡 박사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