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 의병 대열 선봉에 서서 일제 통감부를 노리다

 

▲ 연기우 의병장 어록비(독립기념관).

 

▲ 연기우 의진 활약지 보개산.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 지역에 걸쳐 있다. /사진제공=이우형 현강역사문화연구소장

 

▲ 연기우·허위 의진 주둔지 심원사(현 원심원사).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 소재하고 있다.

 

▲ 연기우 의병장이 대대장으로 활약한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을 기념한 '13도창의군탑'. 서울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에 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강화분견대 봉기, 일본군 압도적 화력에 무너져
주민에 "시가 불태울 것" 협박…무기·탄약 압수
물자 부족 시달리자 병력 이끌고 장단으로 탈출

허위 의병장과 심원사 근거지로 삼고 항쟁 지속
이인영 연합 통문에 동의…휘하 의진 양주 진군
1907년 12월부터 서울 인근서 수십여 차례 교전
대대장으로 한때 동대문 인근 30리까지 진출도



◆ 강화분견대 봉기에 참여한 후 장단으로 나아가다
한말의병에 대한 기록은 의병장이 남긴 기록 약 40종을 비롯하여 일제의 <주한일본공사관기록>, <통감부문서> 외에 일본군의 <진중일지>·<조선폭도토벌지> 등과 일본 경찰과 일제앞잡이 관리·경찰들의 보고서를 정리한 <폭도에 관한 편책>·<폭도사편집자료>·<고등경찰요사> 등이 있고, 그 중에서 <폭도에 관한 편책>은 1907년 8월부터 1910년 8월까지 3년 동안 의병과 관련된 1만여 건의 문서를 122권의 책으로 엮은 것인데, 강화분견대 봉기에 관한 것은 한 건도 없다. 그 이유는 '강화분견대 봉기의 주역 유명규 의병장' 편에 상술한 바 있다.

강화분견대 봉기에 관한 보고는 1907년 8월10일 한국주차군사령부 사령관이 일본군 참모총장에게 강화분견대 해산을 위해 고쿠라(小倉) 대위에게 인천수비대 1소대를 이끌고 가게 했다는 것을 전보로 보고한 것이 처음이었고, 이튿날 봉기한 강화분견대와 강화의병에 의해 일본군 6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는 것이 두 번째 전보 보고였다.

"강화도진위대 해산을 위하여 교관 고쿠라(小倉) 대위에게 인천수비대에 1소대를 달아 오후 0시(12시-필자 주)30분 인천을 출항시킴."
"어제 10일 고쿠라 대위와 함께 강화도에 파견된 1소대는 이날 오후 4시 이 섬에 상륙하려고 할 때, 한국병 약 50명의 사격을 받고서 상륙을 강행하여 한 지점을 점령함. 한국병은 강화부로 퇴각하여 그 수효가 약 300명으로 증가, (강화도진위대의 병력은 약 50명이나 소총이 약 1000정 있을 것이니, 아마 폭민도 가담하고 있을 것임) 성벽을 의지하고서 방어함. 그래서 오늘 11일 오전 6시50분 용산 출발로 다시 대대장 아카시(赤司) 소좌가 인솔하는 보병 2중대(1소대 결), 기관총 2정(앞서 파견한 것과 합하여 4정) 및 공병 장교 이하 14명을 증파하여 폭도를 진압하려고 함. 어제 전투에서 우리 손해는 하사 이하 전사 6명, 부상 5명으로 부상자는 어제 인천에 수용함."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권. 976쪽)

강화분견대의 기습에 놀란 일본군은 갑곶동 북쪽 고지로 가서 반격을 시도하자 강화분견대의 병사들은 강화 내성으로 후퇴하여 일본군의 야습에 대비하였다. 그들은 밤새 일본군과 사격전을 벌여 성을 고수하였으나 이튿날인 11일 새벽 일본군이 기관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공격해 오자 강화분견대 병사와 의병들은 무기의 열세로 인해 그날 아침 8시 성은 무너졌다고 당시 일본군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조선폭도토벌지>에 기록하고 있다.

성 안으로 들어온 일본군은 일경과 일진회를 동원하여 가택수색을 시작하였다. 그날 오후에 일본군 대대장 아카시(赤司) 소좌가 이끄는 증원군 2개 중대(기관총 2정, 공병 1소대)가 도착하여 일본군의 수색전은 본격화되었다. 12일 아카시 소좌는 '향중신사(鄕中紳士)를 모아놓고, 15일 정오까지 도망한 병사의 총기와 탄약을 모조리 거두어 오지 않으면 전 시가를 불태워 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리하여 하루 동안에 총 250정, 화승총 110정, 대포 50문, 구포(舊砲) 대소 240문을 비롯한 많은 무기와 탄약이 압수되었다고 대한매일신보(1907. 08. 16.)에 나타나 있다.

한편, 일본군 증원부대와 싸우던 강화분견대 병사와 강화의병을 이끌던 의병장들은 무기와 탄환이 부족하여 연기우는 장단, 유명규(劉明奎)는 통진, 지홍윤(池洪允)은 해서방면으로 나아갔고, 이능권(李能權)은 김동수(金東秀)·오윤영(吳允榮) 등과 함께 강화의 산속으로 들어간 가운데, 강화분견대 병사와 의병들은 계속 강화도 탈출을 시도하였다. '8월15일 3명의 탈출병은 강도남문 초병을 기습하여 탈출을 시도하였는데, 이들 중 2명은 피살되었고, 1명은 탈출에 성공하였다'는 기사가 대한매일신보(1907. 08. 16.)에 나타나 있다.

◆ 장단에서 맹활약, 13도창의대진 대대장으로서 서울진공 주도
경기도 장단으로 나아간 연기우는 덕물포(德物浦)에서 의진을 수습하여 거의하였다.

"연기우는 강화진위대 부교로 덕물포에서 거의하여 동료 지홍윤과 함께 항전하여 많은 적을 사살한 후 부하 60명을 거느리고 경기도 적성·삭령·마전·장단, 황해도 도산 지방으로 전전 출몰하면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는 지용(智勇)이 뛰어나 싸우면 반드시 이기니 적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또 사행(師行)에 군율이 엄정하여 지방민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으므로 도처에서 지방민의 환심을 사 이들의 비호로 적을 크게 무찔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1권. 566쪽)

이때 강화진위대 시절 동료였고, 강화분견대 봉기 때 함께 참여했던 지홍윤 의병장과 연계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게 되었고, 특히 연기우 의진이 활약하던 지역은 광무황제 퇴위와 군대해산에 반발, 포천·연천·적성·삭녕·철원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던 허위(許蔿) 의병장과 보개산 심원사(深原寺)를 근거지로 삼아 의병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07년 가을, "8도의 의병은 함께 한성(서울)으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일제와의 조약을 파기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관동창의대장 이인영(李麟榮)' 이름으로 된 통문이 날아들자, 연기우는 허위·김수민(金秀敏) 등 여러 의병장과 함께 의진을 이끌고 양주로 나아갔다.

"8월(1907년 음력-필자 주) 그(이인영-필자 주)는 3진의 장으로 8도에 격문을 보내 병사를 소집하고 정부 백관의 죄악을 헤아려 통감 및 각국 총영사에게 글을 보내 일본이 전약(前約)을 어기는 행위가 있음을 호소하였음. 그러는 사이에 지평(砥平:현 양평군 속면)에 이르자 16진의 병사를 합하여 8000여명에 달하였는데 군사를 머물게 하고, 2개월 간 통감의 회답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음. 이 동안 3차례의 접전하였음.
11월에 이르러 홍천, 춘천을 거쳐 양주에 이르자 이때 허위, 이강년이 와서 합하여 무릇 48진, 약 1만에 달하였음. 허위를 군사로, 이강년(李康秊)을 호서장으로, 이태영(李泰榮)을 진동장으로, 김준수(金俊洙:김수민-필자 주)를 안무장(安撫將)으로, 연기우를 대대장으로 삼아 바야흐로 경성에 들어가려고 하여 약 30리 지점에 달하였음. 이 동안 전투가 38회에 달함." (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8권. 1909년 6월12일)

이것은 이인영이 1909년 6월7일 충북 황간에서 대전분견소장 쿠라토미(倉富和三郞) 중위가 이끄는 변장수색대에 의해 피체되어 신문을 받은 내용, '적괴중의 거벽 이인영 체포시말 이인영의 공술' 일부이다.

"허위를 군사로, 이강년을 호서장으로, 이태영을 진동장으로, 김준수를 안무장으로, 연기우를 대대장으로 삼아 바야흐로 경성에 들어가려고 하여 약 30리 지점에 달하였음. 이 동안 전투가 38회에 달함"의 내용을 볼 때, 연기우는 서울진공작전 당시 대대장으로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여 격전을 치른 중심인물이었다.

문 : 당시 경성 부근에 온 적이 없는가?
답 : 있습니다.
문 : 문(門:동대문-필자 주) 밖 20~30리 되는 곳에 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답 : 한리(韓里) 30리 되는 곳에 갔습니다.
문 : 무슨 용건이 있어서 왔는가?
답 : 대(隊)를 데리고 갔습니다. 인원은 약 2000명이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09년 6월30일)

190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48개 의진이 서울 인근 경기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것이 수십 차례 나온다. 이 모든 것은 1월28일(음력 12월25일) 이인영이 부친의 부음을 접하고 귀가하면서 허위에게 각 의진에 서울진공 중지의 통문을 내기 전의 일이었다.

'會者萬餘人 於是 欲進軍入京 擊破統監府 消脅約 剋復國權. 先遣心服人 潛入京城 訪各國領事 細陳其由 以請其援. 軍師其整頓軍旅 準備其進發. 於是麟榮 令各道義旅 促一齊進軍 自率三百人 先至東門外三十里 各軍未至. 日兵先迫 相與奮戰 不可抵敵 乃退軍.'
"(서울진공을 위해) 모인 사람 1만여 명은 장차 서울로 진군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협약(脅約:을사늑약)을 격소(消:銷, 흔적을 없앰)하여 국권을 회복(恢復)하고자 하였다. (이인영은) 먼저 심복으로 하여금 서울로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을 방문하여 (의병을 일으킨) 사유를 진술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군사(軍師:허위)는 군려(軍旅:군대, 13도창의대진)를 정돈하여 진발을 준비하였다. 이에 이인영은 각도의 의려(義旅:의진)에 일제히 진군할 것을 재촉하고, 스스로 300인을 인솔하여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으나 각 의진은 이르지 못하였다. 일본군이 먼저 공격하니 분전하였으나 적의 저항에 퇴군하였다." (필자 역·송상도, <기려수필>. 127쪽)

송상도는 <기려수필>에서 서울진공작전 때 13도창의대진 총대장 이인영이 직접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하여 분전했으나 후퇴하였다고 기술하였는데, 이것마저 국역을 잘못하여 허위가 이끈 것처럼 알려져 있다. 서울진공작전에 대하여 조작에 가까운 왜곡은 식민사학자들의 짓이 아니라, 국사편찬위원회의 잘못이었다.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