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작고한 원로 작사가 정두수씨는 스스로를 '노래 시인'이라 자처했다. '가슴 아프게(남진)', '흑산도 아가씨(이미자)', '잊기로 했네(조용필)' 등 3500곡의 가사를 남겼다. 생전에 한 일간지에 '가요따라 삼천리'를 연재했다. 우리 가요들에 얽힌 한(恨)과 사랑, 그리움의 사연들이다.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에도 간단치 않은 사연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 작사가는 일곱살 소년이었다. 동경 유학생 '식이 삼촌'은 그의 자랑이었다. 마침내 '학병'으로 끌려가며 고향 마을과 작별하던 날의 식이 삼촌. 감꽃이 우수수 떨어지던 어느 날, 그 삼촌은 하얀 광목이 휘감긴 나무상자로 고향에 돌아왔다. 유년의 그 아픈 기억은 이런 '노래 시'로 태어났다. '돌담길 돌아서며/또 한번 보고/징검다리 건너갈 때/뒤돌아 보며/ … 고향의 물레방아/오늘도 돌아가는데'

▶'바쁜 걸음으로 걷다'는 뜻의 트로트는 1914년께부터 음악용어로 쓰였다. 4분의 4박자의 사교댄스 리듬 '폭스트로트'의 유행 덕분이었다. 일본이 재빨리 들여와 그들 음악에 접목한 것이 엔카(演歌)다. 1920년대 말, 조선에서도 '유행가'라는 이름으로 빠르게 퍼져간다. 식민지 시절이었으니 엔카의 영향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 트로트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 땅 서민들의 가장 사랑받는 음악이었다. 식민지 백성의 아픔도, 해방의 기쁨도, 전쟁과 피난살이도, 도시로 나간 이들의 향수병도 … 모두 한국 트로트에 의지해 견뎌온 세월이었다. 그럼에도 때만 되면 '왜색 가요', '뽕짝' 등으로 천대받아왔다. 문화 사대주의의 나쁜 버릇이었다.

▶1970년대 '청년문화'라는 것도 그 정도 수준이었다. '별이 빛나고' 어쩌고 하는 심야 라디오 프로는 온통 '팝송' 잔치였다. 한 외국가수의 내한공연에서 여대생들이 속옷을 던지며 광란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내려왔다. 중학교만 들어가도 팝송의 영어 가사 발음을 한글로 옮겨 적어 외우던 시절이다. 그런 시절을 거치면서도 한국 트로트 '유행가'는 지난 100년간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해 왔다.

▶코로나 풍랑 속에서도 열기를 이어온 한 트로트 오디션이 지난 주말 막을 내렸다. 결선무대의 시청자가 1000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백 투 트로트'라고들 한다. 아니다. '우리 것'에 대한 제대로 된 가치평가라는 생각이다. '물 건너 온 것'을 최고로 치던 자기비하를 극복한 것이다. 우리 핏줄에 흐르는 원초적 정서에 대한 솔직한 이끌림이다. 한때 양주 마신 것을 자랑으로 삼던 이들이 이제는 "역시 소주"라고 하는 것처럼.

정기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