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겸비 필승 의병장 행적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  

 

▲ 강화망상봉수 너머로 내가면과 석모도가 보인다. 이 지역은 1907년 일제에 의한 군대 강제 해산 이후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사진제공=강화군

 

▲ 1907년 7월31일 군대해산 조칙이 실린 관보 호외(1907. 08. 01).

 

▲ 순국선열 연기우 의병장 공적비(강화문화회관).

 

▲ 연기우 의진에서 활약하다가 피체·피살된 김동수 순국추모비(강화중앙교회 정원).

 

 

경기도 삭녕 출신으로 분견대 부교 역임…적성·철원·장단 등지서 수많은 전과
2015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기록 '진위대 복무 중'·'제물포서 의거' 오류



◆ 강화의병장이 되어
연기우(延基羽) 의병장은 기우(起羽·基宇)·기호(基浩)·봉렬(奉烈) 등의 이명이 있는데, <곡산연씨대동보>에는 초명이 민우(敏宇)로 상주목사를 지낸 연비(延庇)의 13세손으로 나와 있다.

연기우는 경기도 삭녕(朔寧) 출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적성(積城)의 선비 출신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순국선열 의병장 연기우 공적비'에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에서 성장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삭녕군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일부는 강원도 철원군에 편입되고, 일부는 경기도 연천군에 통합되었으나 대부분 북한 지역이다.

"경기도 삭녕(朔寧) 출신이다.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강화진위대에서 부교(副校)로 복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해산이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강행되자 통분한 나머지 거의할 것을 결심하였다. 동료 지홍윤(池弘允)과 함께 제물포(濟物浦)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일제에 항거하다가 동지 김동수(金東秀)가 전사하고 지홍윤이 해서(海西)로 진출한 후 홀로 부하 60여명을 거느리고 적성·삭녕·철원·마전·장단·도산 등지로 진출하였다. 본래 군인 출신인데다가 지(智)와 용(勇)을 겸비하여 싸우면 반드시 이겼으므로 적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또한 군율이 엄정하여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도처에서 민심을 얻었으므로 지방민의 비호로 적을 크게 무찔러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권. 734쪽)

이 글에서 "강화진위대에서 부교로 복무하던 중"이란 말이 나오는데, 진위대는 지방의 질서 유지와 변경 수비를 목적으로 각 지방에 설치된 군대로 1895년 9월13일 칙령 170호 '육군편제강령'에 의거하여 궁궐 수비를 위한 친위대와 함께 창설되었다. 몇 차례 개편된 후 1900년 7월25일 진위 제1연대는 경기도 강화, 제2연대는 경기도 수원, 제3연대는 경상북도 대구, 제4연대는 평안남도 평양, 제5연대는 함경남도 북청에 본부를 두었고, 1901년 8월 이후에는 평양진위대가 확대되어 6개 연대 18개 대대로 되었다가 1905년 4월16일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 축소하였다.

그에 따라 강화진위대(정식 명칭:진위 제1연대 제1대대)는 수원진위대 강화분견대로 축소되었고, 1907년 8월9일 유명규(劉明奎)가 주도하여 봉기했을 때는 2개 소대 50여명에 불과했다.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 공동으로 '이달의 독립운동가'(2015년 8월)로 선정된 연기우 의병장에 대하여 국가보훈처가 정리한 주요 공적으로 "강화진위대 복무, 군대해산 후 제물포에서 거의"라고 하였고, 공적 서술에서 "강화진위대 부교였던 연기우는…제물포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라고 하여, 크게 2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강화분견대를 강화진위대로 지칭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둘째, "제물포에서 거의", "제물포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라는 말은 오류이다.

'관보'나 '대한매일신보', 일제의 각종 기록에도 강화분견대 병사들은 강화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강화도 건너편(對岸 대안)이나 해서(海西:황해도) 지방으로 나아갔다고 기록하였다. 그 결과 유명규는 통진(通津:현 김포시 속읍)으로, 지홍윤은 통진을 거쳐 해서 지방으로, 연기우는 장단군 덕물포(德物浦)로 나아가 의병투쟁을 전개했기에 '제물포(濟物浦)'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 이 덕물포를 제물포로 착각했던 것인가?

비단 강화의병뿐만 아니라 각지의 의병 연구가 미흡하여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 흘러온 근대사는 오류가 오류를 낳아 그것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굳어진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특히 국가보훈처의 각종 기록은 일반인에게 전범이 된다는 점에서 오류를 최소화해야 하고, 발견된 오류는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 강화도는 의병이 만든 의병세상
1907년 8월9일 이후 강화지역에서 활동한 주요 의병장은 강화분견대를 이끌었던 유명규, 대동창의진을 구성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이능권, 이능권 의진과 연합했던 것으로 보이는 13도창의대진 안무장 김수민, 강화진위대 부교 출신 연기우·지홍윤, 그리고 박정빈(朴正斌) 의진의 창의돌격대장 출신 김용기와 그의 의진 중대장 박계석, 부장(副將)·별장(別將)으로 활약한 심노술 등이다.

이들 중, 박계석·이능권·지홍윤은 강화 출신이고, 연기우·유명규는 강화도에서 근무한 군인이었지만, 김수민·김용기·심노술은 다른 지역 출신이면서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에서 활동한 의병장들이었다.

1903년 4월부터 1905년 초까지 강화진위대장을 지낸 이동휘(李東輝)는 보창학교를 설립하여 그 명성을 떨쳤다. 1907년 7월과 8월 초에 국권회복을 외쳤고, 전 강화진위대·강화분견대 간부들과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인해 그 해 8월13일 한성(서울)에서 강화분견대 봉기의 배후 조종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후 계몽운동에 매진했지만 1907년 8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강화도는 의병이 만든 의병세상이었다.

"경기의병이 강화에 모이니, 무릇 7천 명이었는데, 왜병과 일진회원 피살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강화도가 크게 어지러웠다." (<매천야록> 제6권. 1908년)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강화에 모인 경기의병이 7000명이었다고 기록했으니, 이를 통하여 강화도는 의병이 만든 의병세상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이토록 많은 분들이 겨레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희생을 했음에도 강화의병에 대한 연구가 미진해서 포상을 받은 분보다 포상을 받지 못한 분이 더 많은 실정이니 참으로 안타깝다 하겠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