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냐, 죽느냐" … 상징과 은유로 그려낸 인간의 핏빛 자화상
▲ 영화 '폭군 이반' 중 이반 4세의 화려한 황제 대관식 장면.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영화 '폭군 이반'의 이반 4세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주장대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로써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위엄을 지닌 지배자란 뜻의 '이반 그로즈니(이반 뇌제·雷帝)' 별칭이 탄생한다. 이반 4세는 16세기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통일 러시아를 건설한 첫 공식 차르이다.

'폭군 이반'은 강한 국가를 위해 절대 권력을 거머쥐려는 이반 4세와 이에 저항하며 그를 죽이려는 귀족들 간의 권력암투를 그린 심리 서사극이다. 이 영화는 영화사상 기념비적인 작품 '전함 포템킨'으로 유명한 러시아(구 소련)의 전설적인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유작이다.

원래 3부작으로 기획되었으나, 1부에 찬사를 보냈던 스탈린이 2부를 보고는 불편한 심기를 내비쳐 결국 2부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고 3부는 촬영분 모두 불살라지는 비운을 맞이했다. 스탈린은 왜 이런 과민반응을 보인 걸까?




●몽타주 미학으로 빛나는 음울한 아름다움

영화는 이반 4세의 화려한 황제 대관식 장면으로 막을 열며 오프닝부터 시선을 압도한다. 특히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지는 외국 사절, 귀족 등 인물들의 몽타주가 그야말로 압권이다. 이 짧은 몽타주 장면만 봐도 이반 4세와 귀족들 간의 관계, 러시아와 유럽국가들 간의 관계 등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는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

영화는 인물들의 대사와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도 얼굴 클로즈업 위주로 표정과 눈빛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포착하여 인물들의 내면세계와 심리변화를 탁월하게 표현하였다.

또한 그림자를 부각한 조명,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건물 구조, 벽면을 가득 채운 이콘화, 기괴한 몸짓과 양식화된 연기 등 표현주의 영화기법 도입으로 점점 난폭하고 잔혹한 광기로 치닫는 이반 뇌제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묘사하였다. 가면극을 보듯 한정된 공간 안에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의 신(scene)으로 담아낸 감독의 연출력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장엄한 분위기의 대관식 오프닝과는 대조적으로 경박한 분위기의 가짜 대관식 엔딩도 매우 인상적이다. 갑작스럽게 흑백에서 컬러화면으로 전환된 '핏빛 향연' 엔딩은 시각적 테러에 가깝다. 최대 정적인 사촌 블라디미르 공을 제거함으로써 대내적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거머쥔 이반 뇌제가 이제 대외적인 야심을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모습으로 2부가 끝난다.

폭력과 처형, 참회와 기도 사이를 오간 이반 4세의 상반된 행위만큼이나 그에 대한 평가도 폭군과 명군(明君) 사이를 오간다. 독소전쟁(獨蘇戰爭) 당시 스탈린은 민족주의 고취를 위해 그를 위대한 황제로 부각하고자 했다. 그러나 에이젠슈타인 감독은 이에 대해선 아예 관심이 없었고 양면성을 지닌 그의 본성을 부각하는데 공을 들였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이반 4세에 관한 영화가 아닌 인간에 관한 영화로 승화되었다. 이에 스탈린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반 뇌제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휘장으로 가려놓은 자신의 자화상을 보는 듯 느껴졌을 테니까. 친위부대를 내세운 이반 뇌제의 '피의 숙청'은 비밀경찰을 내세운 스탈린의 '대숙청'과 겹쳐진다. 어디 스탈린 뿐이겠는가! 휘장을 걷어낸 감독의 죄를 묻고 싶은 자가!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