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국권침탈에 맞서 저항의 닻을 올리다

 

▲ 어선 7척으로 구성된 김용기 의병 선단을 공격하기 위해 군함 치하야(千早)와 수뢰정이 나섰던 말도(唜島) 인근 바다.

 

▲ 김용기 의병 선단을 공격하기 위해 군함 치하야(千早)와 사기(鷺)·우즈라(鶉)·수뢰정(水雷艇)이 나섰다는 일제 기밀문서인 <폭도에 관판 편책>(1908.08.28.).

 

▲ 일본 군함 치하야(千早)와 수뢰정 하이다카(鷂) 등을 동원하여 7척의 어선에 분승한 의병을 말도(唜島:현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부근에서 추격한 기록이 담긴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1권. 508쪽.

 

 

 


1875년 황해도 배천 출생
시위대 부교 출신으로 군대 해산 후 광무황제 밀지 받은 박정빈 의진 창의돌격대 총대장으로 활동
이듬해 4~10월 강화 인근 해역서 일 어선·지도선 공격 등 활약
11월 총기 구입차 경성 갔다 피체1909년 7월3일 경성감옥서 순국



◆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 의병투쟁 기록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의 의병투쟁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4월 이후인데, 당시에는 피체된 의병이 없어서 의병장이나 의진의 규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의병들이 처음에는 한두 척의 범선(돛단배)를 이용하다가 점차 그 규모가 커지고, 심지어 일본인 어선이나 어선 지도선을 빼앗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자 일본군사령부는 군함과 다수의 수뢰정을 동원하고, 현재 우리나라 해병대에 해당하는 육전대(陸戰隊)를 파견하여 의병 진압에 나서게 된 것은 그 해 8월 중순부터였다.

◆ 배를 이용한 의병장 실체 드러나다
일제는 1908년 8월14일부터 18일까지 군함과 수뢰정을 동원하여 강화도 아래의 풍도(豊島)에서 장봉도(長峯島)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인 후 이어 19일부터 26일까지 강화도를 수색하며, 적극적으로 의병 진압에 나서게 되자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피체되는 의병이 생겨나게 되어 강화도 지역의 의진과 의병장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노획한 적선에 승조하고 있던 뱃사공 2명을 취조한 바, 적의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는 전 육군 기병(騎兵) 부교(副校)였던 경성 사람으로서 김봉기(金鳳基)라고 칭하며, 키가 작고 용모는 고상한 인물로서 부장(副將)은 풍덕군 거주 심노술(沈魯述), 1명은 주소 등 불명인 지(池:지홍윤-필자 주) 아무개라는 자로 적의 세력은 70~90명에 불과하나 전연 해적이 아닌 자로 진술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1권. 508쪽)

◆ 일제, 러일전쟁 때의 군함과 수뢰정 동원하다
일본군사령부는 러일전쟁 때 제2전대 통보함(通報艦)으로 활약한 바 있던 군함 치하야(千早)와 수뢰정(水雷艇)으로 활약했던 사기(鷺)·우즈라()·하이다카() 등을 동원하여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을 왕래하는 의병들의 나룻배나 어선을 공격했으며, 9월1일부터 보름 동안 육전대를 파견하여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을 샅샅이 수색하기에 이르렀다.

"(1908년) 8월23일 군함 치하야(千早)로부터 하이다카()호는 주문도(注文島) 동방에 가박(假泊)하여 적상(賊狀)을 감시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동시에 본직(本職:일인 순사 후쿠-필자 주)은 하시타카에 이승(移乘), 오전 6시30분 건평(乾坪) 발묘(拔錨:닻을 올린다는 뜻으로 출항을 뜻함-필자 주), 주문도 동방에 가박 감시 중, 오후 3시 적상 정찰과 근해 유과(遊戈) 중의 키타쿠니마루(北國丸)가 돌아와서 보고하는 바에 의하면, 적은 7척의 어선에 분승, 말도(唜島) 전방으로부터 당(當) 방면에 전진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하시타카는 직시 전진, 말도 부근에 이르렀던 바, 적은 재빨리 수뢰정을 인정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였다. 본정(本艇)은 급행 추적하였으나 천뢰(淺瀨:얕은 여울-필자 주)로 항해가 자유롭지 않아 겨우 2000미터의 위치에서 2척의 적선을 포격하였으나 주효(奏) 없이 적의 수 약 40명은 배천군 갑(岬:곶-필자 주)에 상륙, 도주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508쪽)

"8월24일 기선 주우에마루(住江丸)는 어선 보호를 위하여 연안군 합포도(蛤浦島) 및 각이도(角耳島) 부근에 있었던 바, 동 기선은 기관에 고장이 발생하여 각이도에 기항하여 수선 중, 동일 오후 3시30분 총기휴대의 적도(賊徒:의병-필자 주) 9명은 돛단배 한 척에 타고 합포도 방향으로부터 와서 총기 및 금품을 강요, 선장은 이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적도 등은 선장 및 승조원 3명을 묶어 합포도에 있는 적괴(賊魁:의병장-필자 주) 김봉기(金鳳基)에게 연행하고, 또 총기 및 금품을 강요, 이에 응하지 않으면 일동을 총살하겠다고 협박하므로 선장은 이를 수락하고, 재차 기선으로 돌아와(적도 4명 이에 동행) 현금 223원여 및 엽총 2정, 동 탄약 60발을 약탈 후 4명의 적도는 합포도로 향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511쪽)

일제의 비밀기록 속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보면, 러일전쟁 때 러시아 해군의 동향을 정찰하여 본 함대에 보고하거나 명령을 전달하는 빠른 군함 중의 하나였던 치하야(千早)와 재빠른 수뢰정이 강화도 앞바다에 버티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김용기 의진은 일본 어선 지도선을 공격하여 금품과 무기를 빼앗는 저력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김용기 의진은 8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강화도에서 지홍윤·연기우 의진과 연계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했음이 일제의 기록에 드러나고 있다.('강화의병장 박계석' 편에 상술)

◆ 피체와 순국
1908년 8월 중순 이후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역에는 의병 진압을 위한 일제의 군경과 헌병보조원, 일진회원, 밀정은 물론, 육전대까지 총동원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자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에서 활약하던 의병장은 그 해 11월 이후에는 의진을 이끌고 경기도·황해도 지역 육지로 나가거나 의진을 해산하고 은신하기에 이르렀다.

11월11일 박계석(朴啓石) 의병장과 김덕순(金德順) 의병이 인천경찰서 소속 순사에게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의진의 총대장은 김봉기, 중대장은 지홍일과 박계석이고, 김봉기는 경성인이며, 지홍일은 강화 부내생인데, 김봉기는 11월 2, 3일경 총기 구입을 위하여 현금 1400원을 휴대, 경성에 갔다'는 진술에 의해 그는 피체되기에 이르렀다.

1909년 3월2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형(絞刑)이 선고되고, 이어 4월30일 경성공소원과 5월20일 대심원에서 공소와 상고가 모두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법부에서, 강도살인범 김용기(金龍基), 내란범 유지명(柳志明)을 모두 교형에 처하는 데 대한 안건을 상주(上奏)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한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909년 6월25일)

김용기 의병장은 일제 앞잡이 내각의 상주와 융희황제의 재가에 의해 마침내 7월3일 경성감옥(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 전신)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1875년 황해도 배천에서 태어나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서 시위대 기병 부교(副校) 출신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1907년 8월 광무황제의 밀지(密旨)를 받고 거의한 박정빈(朴正彬) 의진에서 창의돌격대 총대장이 되었고, 김봉기(金鳳基)라는 이름으로 1908년 4월부터 10월까지 박계석·지홍윤 등의 의병장, 수십 명의 의병과 함께 강화·교동과 인근 도서지방, 개성·풍덕은 물론, 황해도 배천·연안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었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는데, 함께 재판을 받은 의진의 의병 김덕순(징역 15년. 1995년 독립장)보다 한 등급 낮은 서훈이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