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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너머의 영화들] 4.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잠입자(Stalker)'
[시간 너머의 영화들] 4.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잠입자(Stalker)'
  • 여승철
  • 승인 2020.02.24 18:02
  • 수정 2020.03.11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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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협화음 세계에 울려 퍼진 '믿음, 사랑, 희망'의 하모니
▲ 영화 '잠입자' 중 안내자 딸이 눈빛으로 물컵을 움직이는 장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2500여년 전, 이 물음에서 최초로 올바른 삶에 대한 인간의 철학적 사유가 시작되었다. 영화 '잠입자'(1979)는 우리를 '소원의 방'으로 안내하여 이 근원적 질문을 다시금 던진다. '소원의 방'은 20년 전 운석인지, UFO인지, 핵폭탄인지 모를 섬광이 비친 후 인간의 접근이 통제된 금지구역 내에 생긴 신비한 공간이다.

'잠입자'는 작가, 과학자가 안내자의 인도로 이 신비한 공간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SF영화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전작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 시간, 공간, 사건의 통일성을 견지하여 관객들을 여정에 동참시킨다. 그리고 시간, 공간, 사건의 모호성으로 가득한 꿈, 환영 장면을 삽입하여 관객들을 명상으로 이끈다.

감독은 '대비의 미학'을 운용하여 불협화음의 세계와 협화음의 세계를 탁월하게 그려내었다. 잿빛 흑백화면의 삭막한 도시는 익숙한 일상공간인데도 불구하고 쇳소리, 기차소리 등 소음과 함께 불협화음을 자아내며 거북한 공간이 된다. 반면에 천연색 컬러화면의 금지구역은 인간들이 버린 건물 잔해가 대자연에 의해 점령당한 다소 낯선 풍경인데도 새소리, 물소리 등 자연음과 함께 아름다운 화음을 자아내며 편안한 공간이 된다.

공간의 대비 외에도 시간의 대비도 눈에 띈다. 불쑥불쑥 등장하는 흑백화면의 꿈, 환영 장면은 영화의 순차적 시간흐름을 깨뜨리며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이런 불협화음의 세계는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에 의해 초래된 우주의 부조화가 결국 인간을 고독하고 불행한 존재로 남게 했음을 보여준다.

●'대비의 미학'으로 그려낸 불협화음과 협화음의 세계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 "(요한계시록 6:12)로 시작하는 내레이션은 클로즈업 영상과 함께 묵시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주사기, 기관단총, 시계태엽장치, 달력, 동전, 예술작품 등 문명의 산물이 수장(水葬)된 물 속 광경은 음울한 전자음악이 더해져 종말론적 계시를 실감하게 한다. 어쩌면 '소원의 방'은 절망적인 인간에게 신이 내리신 구원과 희망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천신만고 끝에 방 앞에 도착한 작가와 과학자는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포기하고 만다. 이들은 자신의 본질적인 욕망과의 대면이 두려웠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방은 인간 내면의 은밀한 소원을 이루어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 줄 알았던 여정은 마지막에 반전이 일어난다. 방 안에 들어가는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안내자의 집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안내자의 신실한 믿음과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이 일궈낸 기적이다. 다리가 불구인 딸이 눈빛으로 물컵을 움직이는 화면 위로 믿음과 사랑의 화음이 이루어낸 구원과 희망의 합창교향곡이 울려 퍼진다.

문득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 그리스 델피 신전에 새겨진 경구가 떠오른다. 이 경구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다 보면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도덕경'의 진리처럼, 물처럼 유약한 안내자야말로 진정한 승자이자, 지자(智者)이다. 그래서 그의 여린 음성은 반향음을 내며 우리들 내면을 강타한다. "당신들은 깨어있는가?"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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