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에 상륙한 신앙심은 이롭게 퍼져나갔다

 

 

▲ 제물포 천주교 여자고아원 사진엽서

 

▲ 랜디스 영어학교 학생들

 

 

프랑스 '천주교' 이승훈 세례로 전파
대원군 탄압으로 움츠러들었으나
한불조약 체결후 선교사 거주 허용돼
제물포에 본당 열고 기술·초교 설립

영국 '성공회' 전도한 랜디스는
의료활동 펼치며 영어학교 세우고
'개신교' 전한 알렌은 국립병원 열어



조선에서 본격적인 서양 종교의 전파는 중국에 파견되었던 사신들이 가져온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학문 이상의 관심은 불러일으키지 못하다가 이익(李翼)의 뒤를 이은 기호 지방의 남인 학자들에 의해 종교로서의 천주학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정부의 가혹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은 천주교 신자들의 노력은 1784년에 북경을 방문한 이승훈(李承薰)이 영세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비공식적인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다. 신자들이 늘어나자 로마 교황청은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를 통해 조선 대리감목구(代理監牧區)를 설정하고 전교하도록 하였다.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는 중국 산동성 지푸(之)를 중간기착지로 삼아 조선교구 활동을 전개하였다. 1838년 말에 이르러 신자 수가 9000명으로 집계될 정도로 발전하던 조선 천주교 전교활동은 그러나 대원군 집정 10년간의 가혹한 박해와 탄압으로 인하여 움츠러들었다.

서양종교의 포교는 조선이 개국을 하고 1886년 6월4일 한불수호통상조약 체결하고 나서야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런데 포교권 인정 이전부터 외국인의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던 개항장 인천에는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일본 종교들이 이미 들어오고 있었다. 인천은 천주교와 기독교 선교사들의 경유지에 그치지 않는 한국 최초의 포교지역이었다.

수세기에 걸쳐 혹독한 박해와 탄압에 직면했던 천주교 선교사들은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된 후 비로소 서울과 개항장 거주가 허용되었다. 당시 블랑(Blanc, 白圭三) 주교는 성당을 지을 대지를 서울과 개항장에서 물색하기 시작하여, 지금의 명동인 종현 언덕에 넓고 전망 좋은 대지를 매입하여 정지작업을 시작하였다.
1887년 개항지 원산에 본당을 설립한 주교는 곧이어 상업이 번창하고 수도의 관문인 제물포에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를 초대 본당신부로 임명하여 본당을 설립하도록 하였다. 1899녀 7월 제물포 답동에 성당을 건립한 천주교 제물포본당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와 함께 고아원을 운영하였고, 조선인 자제들을 위한 여자기술학교와 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사회복지선교와 교육선교에 힘을 쏟았다.

프랑스 천주교회에 이어 영국의 성공회 교회도 제물포와 강화도를 통해 조선선교를 시작하였다. 영국 성공회가 동아시아에 진출한 것은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인 1844년 중국 선교로 시작되어 중국에 모두 14개 교구를 마련하였다. 일본에서는 1874년 최초의 미사를 드리고 1875년 신자 11명에게 견진성사를 베푼 것이 선교의 시초이다.

중국, 일본과 달리 한국 선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주교 없는 곳에 교회를 가질 수 없다"는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중국선교와도 부분적으로 관계가 있던 영국 해군종군사제인 코프(C. J. Corfe)를 한국 선교의 책임자로 선임, 1889년 11월1일 주교로 승품하여 파송하였다. 초대 코프 주교는 1889년 '해군병원기금'의 후원을 얻어 외과의사 와일스(Julius Wiles)와 내과의사인 랜디스(E. B. Landis)와 함께 1890년 제물포에 도착하여 주로 성누가 성당을 건립하고 의료선교를 집중적으로 전개하였다.

미국의 젊은 성공회 신자인 의사 랜디스는 의료활동과 함께 영어학교를 개설하여 국적을 가리지 않고, 제물포의 아이들에게 교육전교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제물포 성누가성당과 병원은 1898년 4월16일에 랜디스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초창기의 활기를 잃게 되었다.

한편, 개신교는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직후부터 조선 선교 사업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884년 7월에 감리교 측 선교사 맥클레이(R. S. Maclay) 목사가 선교 개설 준비를 위해 다녀갔고, 9월에는 의사 알렌(H. N. Allen)이 의료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1885년 광혜원(廣惠院)이라는 국립병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 후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 제물포에 함께 상륙한 미국 북장로회의 언더우드((H. H. Underwood)와 북감리회의 아펜젤러9 (H. G. Appenzeller)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개신교 포교가 본격화되었다. 아펜젤러 부부는 6월22일 인천에 두 번째로 상륙하여 1개월간 머물다 서울로 들어갔는데, 이 사이 7월19일에 인천에서 처음으로 종교집회를 가졌다. 내리교회에서는 이 종교집회가 제물포교회(내리교회)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미국 북장로교회가 서울을 중심으로 선교사업을 전개한 반면, 미국 북감리교회는 인천을 중심으로 한국 서지방 선교를 집중적으로 전개하였고, 주로 영화학당과 이화학당, 배제학당 같은 교육선교와 의료선교에 집중하였다. 황해바다를 거쳐 제물포에 상륙한 서구 종교들이 근대적인 의료, 교육, 복지, 문화 선교를 진행함으로 해서, 조선은 더 한층 빨리 근대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인천에서 기리는 천주교 순교자들]

 

 

▲ 제물진두 순교성지
▲ 제물진두 순교성지

 



한국 교회의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이승훈은 서울 문밖에서 태어난 사람이지만 그의 선향은 인천의 동방 외곽지인 반주골(지금의 장수동)이었다. 북경에서 돌아온 이승훈이 1784년 9월 이벽(李檗)에게 세례를 주고, 서울 명례방(明禮方)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집회를 가짐으로써 최초로 천주교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후 천주교 신앙은 계층과 지역을 불문하고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조선 정부에 의한 천주교 박해도 점차 심해져 갔다. 1801년 정치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대규모의 신유박해(辛酉迫害)의 상황과 한국 교회의 실정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는 <백서(帛書)>를 작성한 이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이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주요인물 중 한 사람인 황사영의 탄생지가 강화읍 월곳리 대묘동이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수가 9000명으로 집계될 정도로 확산되던 1838년 10월 인천의 정바오로가 조상의 위패를 부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가족들이 이를 인천부사 이형원(李衡遠)에게 고발하였다.

이에 정바오로는 곧 도망하여 화를 면하였지만, 이 사건으로 인천에 거주하고 있던 50명 이상의 천주교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12명 정도의 신자들은 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학(邪學)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취지로 1839년에 발표된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으로 시작된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에도 인천에서는 김성임(金成任)을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1845년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1846년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교수되면서 시작된 병오박해(丙午迫害) 때도 인천의 여러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대원군의 집정과 함께 시작된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는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주교와 다블뤼(Marie Antoine Nicolas Daveluy) 주교를 비롯한 많은 외국인 신부와 한국인 신자들이 효수되었다. 천주교 신자뿐만이 아니라 혐의가 있다고 생각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해진 가혹한 박해였다.

인천 중구 한중문화관 옆에 2014년 5월15일 준공된 제물진두(祭物津頭) 순교성지는 서울 절두산(양화진두)과 함께 19세기 천주교인들의 대표적인 공개 처형장으로 추정되는 제물진두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을 기리는 역사적인 장소다. 인천시에서는 국내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이승훈을 기념하는 역사공원을 남동구 장수동 일대에 2022년까지 조성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