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보편문자가 한자(漢字)였던 시절, 백성들은 수천 년을 문맹으로 살아야만 했다. 세종대왕은 우리 말소리를 쉽게 담을 수 있는 28자를 창제했다. 우리말과 거리가 먼 한자를 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대부들은 민초들을 마음대로 통치해왔는데, 그것이 곧 권력의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글자를 힘없고 천한 서민들에게 임금 스스로 알려주었다는 것은 궁궐을 드나들며 권력과 위세를 부려왔던 세력과 힘을 온 천하 사람들에게 고르게 나눠주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이 얼마나 천지개벽할 일인가.

세종실록을 보면 생각보다 한글 창제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한글 창제의 중심에는 아마도 세종대왕이 신뢰할 수 있는 왕족(대군)과 신료 몇 사람이 중심이 되어 비공개적으로 진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세종 25년(1443) 47세의 임금이 12월30일에 훈민정음 창제를 발표했다. 기록에는 '언문(諺文)'과 '훈민정음(訓民正音)' 두 명칭이 동시에 등장한다. 언문은 일반 명칭으로 훈민정음은 특별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언문'이란 말을 '훈민정음'의 낮춤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본뜻은 '전하는 말이나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그대로 옮기어 적을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용비어천가'(처음에는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를 한글, 한문 혼용으로 펴내는 언해사업과 훈민정음 해례본의 출판 작업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집현전 원로학자인 최만리(崔萬理, ?~1445)를 중심으로 혹독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최만리는 고려 때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렸던 최충(崔沖, 984~1068)의 12대손으로 집안대대로 벼슬해온 금수저 출신이었다. 최만리 일파의 반대 상소문은 길지만 그 요지는 첫째, "천하의 수레는 그 궤도가 같고 책도 글자가 같다(車同軌 書同文)"는 것으로 조선은 중국의 글자와 예법을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글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다시 정리해보면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와 모화(慕華)사상에도 맞지 않고 실제 정치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신하들의 의견도 듣지 않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도 이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그대들이 말하기를 '소리를 사용해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글에 위배된다'고 하는데 설총의 이두도 음을 다르게 만든 것이 아닌가? 또 이두를 만든 본뜻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고 한 것이고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인데 설총은 옳다고 하고 내가 하는 일은 그르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말하는 세종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했으며 고독했을까! 가슴이 뜨거워진다.

오늘날 되새겨야 할 세종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신분보다는 능력을 우선했다는 것이다. 세종 재위 32년 동안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463명인데, 이중에서 신분이 낮거나 불분명한 사람이 155명(전체의 33.47%)이다. 서얼 출신으로 알려진 황희(黃喜, 1363~1452)가 24년간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훌륭한 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장영실(蔣英實) 역시 귀화한 중국인의 아들로서 관노였으나 천재성을 인정받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종3품이 되었고, 안견(安堅)은 잡직 종6품으로 제한된 화원을 정4품으로 제수하고, 의원 노중례(盧重禮)는 당상관이 되었다. 고려말 위구르에서 귀화한 설송의 손자 설순은 집현전 부제학에 올랐고, 야인 귀화인은 화살을 만들고 왜인 귀화인은 칼을 만들고 유구국 귀화인은 배를 만드는데 참여했다.

세종 시대 성리학자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낸 성균관의 사성(司成)을 지내고 관학삼김(館學三金)이라 불렸던 김구(金鉤), 김말(金末), 김반(金泮) 중에 김반은 강서김씨(江西金氏)의 시조가 될만큼 집안이 한미했고 김말은 의성김씨 족보에 계보가 보이지 않는다. 세종이 대군시절 스승이었던 이수(李隨)는 봉산이씨(鳳山李氏)의 시조가 되었고 집현전 학자 김문(金汶)은 어머니가 무당이었다. 일본을 수십 차례 사신으로 왕래했던 일본 전문가 이예(李藝)는 울산의 아전으로 종2품에 올랐다.

예를 들다보면 한이 없지만, 세종대왕이 노비의 인권에도 비상한 관심을 갖고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 귀천(貴賤)이 없었다"고 하면서 노비도 하늘이 낸 천민(天民)이라고 입버릇처럼 선언했고 이를 실천했다. 관비(官婢)와 그 아이의 건강을 위해 종전에 산후 7일간 주던 휴가를 산전 한 달, 산후 100일을 주고 남편에게도 한 달의 휴가를 주었다. 다만 사노비에 대해서는 주인이 따로 있으므로 관여할 수 없었다. 또 여종(女婢)이 양인과 결혼해 낳은 아이가 노비가 되느냐? 양인이 되느냐는 중요한 문제였다. 세종은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을 내세워 종래의 어미를 따라서 노비가 되는 제도를 반대해 아버지를 따라 양인이 되는 것을 주장하고 실행했다.

오늘날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은 과거의 신분제 못지않은 차별이며, 근로자의 인권과 노동조건은 그 시대로부터 얼마나 더 나아졌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우리는 세종의 참모습을 찾는 연구를 좀 더 심도 있게 해야겠다. 이것은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현실에 매몰된 생각에서 깨어나는 일이 아닌가! 우리도 밖에서만 대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역사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아 밝힐 때가 온 것 같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