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길모 천주교 초대 인천 교구장 선종...생애는
대우차 노동자 정리해고 때
'사회적 죄악'이라며 우려해

'해외 입양'도 큰 도움 주며
어려운 아이들 항상 보살펴
1966년 12월 덕적성당 축성식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 고( 故) 나길모 주교. /사진제공=서재송씨

천주교 인천교구의 초대 교구장을 지낸 나길모(사진) 주교가 3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선종했다. 향년 94세.

나 주교는 1926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나 1944년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입회해 메리놀대신학교 학부와 신학원을 졸업했다. 1953년 사제품을 받은 뒤 한국으로 건너와 1954∼1961년 청주교구 내 본당 보좌신부와 주임신부, 참사, 부감목을 지냈다.

1961년 인천대목구가 서울대목구에서 분리되면서 인천대목구장으로 임명돼 그해 8월, 주교품을 받았다. 1962년 교황청이 한국 교회의 교계제도를 정식 인준하면서 초대 인천교구장으로 전보됐다.

나 주교는 인천 교구장으로 취임한 뒤부터 41년동안 교육사업을 중심으로 복음 선포에 힘쓰며 인천 천주교의 초석을 다졌다.

나 주교는 1962년 4월 교구장 취임후 첫 부활절 메시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교우들은 중요한 교회 본분과 계명을 열심히 그리고 용감하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라며 신실한 교우가 되기를 당부했다.

2001년 11월 11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대량 정리해고 사태 때는 "노동할 의사와 능력을 가진 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여 실업자를 발생시키는 일은 어떠한 경우라도 사회적 죄악이며, 사회적 재앙"이라며 "정부와 자본의 독선적인 정상화 노력에 우려와 함께 그것이 야기할 사회적 마찰과 대립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다.

나 주교는 사회의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형제애로 특별한 관심과 기도를 부탁하는 등 교회와 교우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해외 입양인들의 아버지'로 불리며 나 주교와 남다른 인연이 있는 서재송 전 '성 원선시오의 집' 원장은 "주교님의 선종 소식을 듣고 가슴 한켠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며 "어려운 아이들을 볼 때마다 좋은 말씀을 들려주며 보살펴주셨고 입양에도 큰 도움을 주셨다"고 말했다.

서씨는 "한번은 덕적본당에 견진성사를 드리러 오셨을 때 바닷물이 빠져 인천~대부를 오가는 연락선이 뜨지 못하게되자 주교님이 신자들과 함께 한방에서 주무실 정도로 소탈하고 인천에 대한 열정과 애착이 대단하셨다"며 "1994년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 때는 답동 가톨릭회관 뒷마당에 천막을 치고 투쟁하는데 항상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고 말했다.

나 주교는 2002년 4월 인천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은퇴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생활했다. 고인은 2011년 주교 서품 50주년인 '금경축(金慶祝)'을 맞아 한국을 찾기도 했다.

나 주교의 분향소는 천주교 인천대교구청 보니파시오 대강당에 마련됐다. 위령미사는 10일 오전 10시 30분 인천 중구 답동 주교좌성당에서 있을 예정이다. 032-765-6961  


/여승철 기자 yeopo99@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