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생활 유익한 학문 중에서도 '농학'에 열중
▲ 서유구 찬·서우보 교, 간사자 및 간사년 미상, <임원경제지> 표지, 국립중앙도서관
▲ 서유구 찬·서우보 교, 간사자 및 간사년 미상, <임원경제지> 표지, 국립중앙도서관

 

아래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대한 평이다.

 

나라의 병폐 고칠 경륜 깊이 감추고
醫國深袖經綸手
임원의 즐거운 일 나눠 즐기실 뿐
林園樂事聊分甘
내 와서 <임원경제지> 구해 읽어 보니
我來求讀十六志
신기루 속 보물처럼 엿보기도 어려워라
海市百寶難窺探

박규수(朴珪壽·1807~1876)의 <환재집(齋集)>, <환재선생집>권3 '시' '정서풍석치정상서(呈徐楓石致政尙書)'에 보이는 시이다. 박규수는 이 책을 '신기루 속 보물'이라 하였다. 박규수는 연암의 손자로 개국통상론을 주장한 조선 후기 개화 사상가였다. 문장도 내로라할 정도였으며 벼슬도 우의정까지 오른 이다. 결코 지나가는 말로 '신기루 속 보물'할 이가 아니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의 삶을 '오비거사(五費居士)'라 정리했다. '다섯 가지를 낭비한 삶'이란 뜻이다. 선생은 생전에 '오비거사생광자표(五費居士生壙自表)'라는 자찬묘지명을 지었다. 79세 때 글이니 이승 하직 3년 전이다.

학문에 괴로울 정도로 빠져 들었으나 터득한 것이 없고 벼슬살이하느라 뜻을 빼앗겨서 지난날 배운 것을 지금은 모두 잊었다. 마치 '도끼를 잡고 몽치를 던지는 수고(不勝其斧之握而推之投也)'이다. 이것이 첫 번째 낭비이다.

관리로서 온 힘을 다하여 '손에 굳은살이 박이고 눈이 흐릿하게 되는 수고(不勝其手之胝而目之蒿也))'를 했지만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이 두 번째 낭비이다.

농법을 묵묵히 익혔지만 '일만 가지 인연이 기왓장 깨지듯 부서졌다(萬緣瓦裂)'. 이것이 세 번째 낭비이다. 이것이 병인년(1822년·순조 22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있었던 세 가지 낭비이다. 그 이후 다시 두 가지 낭비가 있었다.

아버지가 귀양에서 풀려나 후한 벼슬을 차례로 거쳤으나 군은에 보답 못하고 기력이 소모되어 휴가를 청했으니 마치 '물에 뜬 거품처럼 환몽 같다(幻若浮漚))'. 이것이 추가되는 첫 번째 낭비이다.

<임원경제지>를 편찬, 교정, 편집하는 수고가 30여년이다. '공력이 부족해 목판으로 새기자니 재력이 없고 간장독이나 덮는 데 쓰자니 조금 아쉬움이 있다(以之壽梓則無力 以之覆瓿則有餘)'. 이것이 또 한 가지 낭비이다.

선생은 이미 70하고도 9년을 산 것이 '작은구멍 앞을 매가 휙 지나가는 것과 다름없다(無異過空之鴥隼)'며 "아아, 정말로 산다는 것이 이처럼 낭비일 뿐이란 말인가?(嗟夫人之生也 固若是費乎)"라고 차탄(嗟歎)한다. 선생은 손자 태순(太淳)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내가 죽은 뒤에는 우람한 비를 세우지 말고, 그저 작은 비석에 '오비거사(五費居士) 달성 서 아무개 묘'라고 써준다면 족하다(死之後 勿樹豐碑 但以短碣書之曰 五費居士達城徐某之墓可矣)"
각설하고 우선 선생의 실학사상을 살피려 '금석사료서(錦石史料序)'부터 본다.

나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부질없이 메뚜기, 기장, 조 따위를 말하면서 세상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는 저술하는 선비가 가장 그러하다. 그 중 용렬한 자는 빚을 내고 새경이나 받고자 남의 집 울타리 밑에 빌붙어 산다. 그 중에 현명한 자는 괴이한 말과 근거 없는 이치로 허위를 일삼아 실용에 절실하지 않는다. 이익이 없는 학문에 정신이 피폐해지면서 오히려 두려워하면서도 재목을 허비하여 책을 찍어 이 시대를 가르치고 먼 훗날 전해질 것을 기대하는 자가 천하에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이를 보면 선생의 실학 정신은 명백하다. 선생은 실학 중에서도 농학에 힘썼다. '행포지서(杏圃志序)'에 보이는 글이다.

나는 오로지 농학(農學)에 골몰한 자이다. 궁벽한 늙은이가 기운을 소진시키면서 그치지 않는 것은 이것은 참으로 무엇 때문인가? 나는 일찍이 경예(經藝)의 학문을 하였다. … 처사가 마음속으로 홀로 마음을 헤아려 말하지만 흙으로 끓인 국일 뿐이요 종이에 그린 떡일 뿐이니라. 잘 쓴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이에 그런 글들을 폐하고 범승지(氾勝之·한대의 농학가로 <범승지서(氾勝之書)>를 지었다), 가사협(賈思勰·위진의 농학가로 <제민요술(濟民要術)>을 지었다)의 재배기술이나 익혀 망령되이 오늘 앉아서도 말할 수 있고 일어서서도 실용에 베풀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고루하고 헛된 학문을 '흙으로 끓인 국이요 종이에 그린 떡'이라고 '토갱지병(土羹紙餠)' 넉 자로 정리한다. 이만 하면 선생의 실학사상은 증명된 셈이니 <임원경제지>로 들어간다. 여기서 한 가지 알고 넘어갈 게 있다. 이 책의 내용은 다른 책에서 80~90%는 가져 온 편집이란 점이다. 편집은 이 책 저 책에서 발췌 수록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선생이 아무 것이나 실어 놓은 게 아니란 점에 유념해서 이 책을 보아야 한다.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br>​​​​​​​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br>​​​​​​​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