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익  

이리 오시라

와서
천년을 마모된 내 얼굴이며 손발,
몸뚱아리를
눈으로 보시라, 손으로 한번쯤 만져보시라

문둥이처럼,
흡사 문둥이처럼 문드러진 내 코며 입술,
눈덩이며 귀, 그리고 뺨을
가까이 다가와서 만져보시라

더러는 팔이 부러지고
더러는 목이 부러진 채
천년을 어느 외진 산자락에 서 있어도
나는 너그럽게
가녀린 미소 하나로 영원을, 영원을 품고 있어라
그러길래 …

오늘은 마음 상한이여
그대는 하루쯤 경주 남산으로 와서
깊이 나를 보시라, 문드러진
不和(불화)의 내 육신 옆에 서거나 누워

잊으시라, 저 微物(미물) 같은 세상 온갖 희비를

천 년을 비바람 맞으며 마모되고 문드러진 석상이 하나 있다. 석상은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해 '불화의 육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폐허가 되었지만, 가녀린 미소 하나로 영원을 품고 있다.
인간의 삶은 길어야 팔구십 년. 그 짧은 시간을 살면서도 무어 그리 희로애락이 많은지 하루하루 사연 없는 날이 없다. 울고 웃고 사랑하고 원망하고 속고 속이고. 저 외진 곳에 서 있는 천 년 석상이 바라보는 인간의 삶은 그저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데, 미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단 한시도 멈추지 않고 무엇인가를 탐욕하고 애증한다. 마치 자신만은 영원히 폐허에 이르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듯. 시간은 매우 이중적인 개념을 띤 상징성을 지닌다. 똑같은 시간을 평안하고 길게 쓰는 이가 있는 반면, 조급해 하며 찡그리며 짧게 쓰는 이가 있다. 천 년 전 어느 석공의 손에 빚어진 석상의 미소가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따뜻한 시간의 빛이 있는가 하면, 촘촘한 탐욕과 부정의 몸짓이 만든 시간의 얼룩이 있다.
지금 마음 상한이여, 오늘 하루쯤은 문드러진 불화의 육신으로 세상을 향해 부르는 저 석상의 노래를 들어보라. 낡고 낡은 폐허의 노랫소리가 귀에 들려온다면 그대는 이미 반쯤 석상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권영준 시인·인천 부개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