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本報)는 인천시가 발표한 '2019년 인천시 사회지표 조사'를 상세히 분석 보도했다. 그간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중단했던 조사를 6년 만에 재개한 것인데, 조사원들이 지난해 8월21일부터 9월11일까지 시민 1만8260명을 대상으로 삶의 질과 지역 인식 등을 파악하기 위해 각 가정을 직접 방문해 물었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식, 여성의 사회 위상 존중 여부, 반려동물에 대한 사회적 합의, 시민 생활의 만족도 등 여러 부문의 조사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출생 지역이 어디인가?"와 "인천을 고향으로 여기는가?" 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함께 "인천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는가?" 같은 지역 지향적 문항도 들 수 있다.
하지만 웬만한 국가만한 인구 300여 만명 중에서 9000가구, 1만8000여명만을 조사한 것이어서 요즘의 여론조사보다는 신뢰하고 싶지만, 시민 가운데 인천에서 출생한 이가 38.7%에 달한다는 것은 왠지 실감 있게 들리지 않는다.

'시도(市道)'는 물론 '군(郡)' 단위에 이르기까지 각종 향우회가 성행하는 게 현실이고 보면, 인천 38.7%, 서울 13.3%, 호남 12.1%, 충청 10.6%, 경기 10.5%, 영남 8.2%, 강원 4.3%순이 현실에 얼마나 근접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인천시는 61.3%의 시민이 이주민(移住民)이라고 전하지만 필자 연배들은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측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고향처럼 느끼는 이'가 68.8%이고, '소속감을 느끼는 이'가 37.1%라는 대목은 긍정적으로 보인다.
인구사(人口史)적 측면에서 볼 때, 이 같은 현상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1883년 개항 후 인천 인구는 계속 증가해 왔고, 최근 서울, 부산, 대구 등지의 감소 추세와는 다르게 인천의 인구 증가는 현재진행형이다.

개항 당시 100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는 부민(府民)이 37년 후인 1920년에는 3만6490명으로 폭발했고, 조선인 2만3855명, 일본인 1만1281명, 청국인 1318명, 기타 36명이었다는 통계는 인천사 이해의 열쇠가 된다.
싫든 좋든 개항은 인천에 과거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서구 문물의 유입을 불러왔다. 등대, 호텔, 부두, 무역, 세관, 해운업, 상업, 우편, 전화, 기차, 양관 등 근대자본주의의 물결이 속속 밀려왔고, 그에 따라 창출된 일자리와 새로운 삶을 찾아 조선 8도의 꿈과 용기를 가진 이주민들이 대거 인천으로, 인천으로 이주해 왔던 것이다.

두 번째의 인구 구조 변화의 큰 요인은 광복과 6·25전쟁이었다. 광복 직전인 1944년의 인천 인구는 조선인 19만140명, 일본인 2만1740명이었는데, 일본인 철수 5년 후인 1949년에 무려 26만5767명으로 24.3%가 늘었다. 이는 분단 직전, 공산주의 체제를 피해 온 월남인과 6·25전쟁 후 인천에 정착한 피난민들에 의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인천 인구사'(이준한·전영우 공저)에 따르면, 1955년 인천의 이주민 4만4934명 중 북한 출신은 3만9722명으로 전입자의 94.7%에 달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인천은 개항 때부터 오늘까지 복합적 인구 구조를 가지게 되면서 소위 '우리가 남이가?'식의 망국적 지역주의, 순혈주의를 일찍이 벗어나 사람을 '출신지'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는 근대적 인간관을 실천해 온 도시인 것이다.

그 같은 배경이 '해불양수(海不讓水)'적 정체성을 지니게 했고,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한 가닥의 희망과 꿈을 안고 살러 오는 도시가 되게 했던 것이다. 이는 인천의 또다른 긍지인 것이다. 몇 년 전 사람들이 말하던 '이부망천(離富亡川)'은 그런 점에서 인천이란 도시가 갖고 있는 탈 지역주의, 탈 배타주의, 탈 전근대주의를 옹호한 친인천적(親仁川的) 역설로도 들린다.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