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작인가? 걸작인가? … 봉인된 10년, 그 봉인을 푼다 
▲ 칭청과 만신의 만남 장면.


인천일보가 2020년 새로운 연중기획으로 영화와 관련된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 감독에 대한 소개와 이해를 돕는 '시간 너머의 영화들'을 2주에 한 번씩 화요일자에 연재한다. '시간 너머의 영화들'은 고정된 틀을 정하기보다 시대를 초월해 영화와 함께 연상되는 위대한 작품과 영화감독들을 소개한다. 집필을 맡은 '시희(SIHI)' 영화 에세이스트는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는 영화인 전문 양성 공립대학인 베이징영화학원(北京電影學院·Beijing Film Academy·BFA)에서 영화연출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영화학원은 장이머우(張藝謀), 천카이거(陳凯歌), 톈좡좡(田壯壯) 등 세계적인 감독을 배출한 대학이다.


"10년 내로 '무극(無極)'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005년 쏟아지는 비난에 천카이거(陳凯歌) 감독이 한 말이다. '패왕별희'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세계 거장 반열에 오른 중국 5세대 영화감독 천카이거에게 있어, '무극'은 가혹한 시련을 안겨준 작품이다.
장동건, 장백지(柏芝) 등 아시아 스타들이 총출동한 이 영화는 중국 최초의 판타지영화다. 그러나 개봉 전의 뜨거웠던 관심은 개봉 후 차가운 냉소와 비난으로 돌변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무극'은 망작일까? 아니면 저주 받은 걸작일까?

영화는 세상 탄생 초기 하늘과 바다, 그리고 설국(雪國) 사이에 있는 왕국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왕비 칭청, 패배를 모르는 장군 광밍, 그를 질투하는 공작 우환, 바람처럼 빠른 노예 쿤룬 네 사람의 엇갈린 사랑과 운명을 화려한 영상에 담아낸 판타지 액션 영화다. 영화는 20년 전 전쟁터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칭청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칭청은 만신(滿神)과의 약속으로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대신 진정한 사랑을 얻지 못하는 기구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동양 우주론을 스크린에 형상화시킨 심오한 영화

동양 철학에서 '무극(無極)'은 다함이 없는 태초의 우주상태, 즉 태극(太極)이 발현되기 전 상태로 모든 존재의 시원(始原)이다. 사실 이 영화는 〈주역>, 〈도덕경〉 등 중국 고대 철학을 차용해 무극, 태극, 음양, 팔괘, 육십사괘의 우주원리를 인물과 영화 속 배경을 통해 형상화시키고 여기에 불교의 인연설, '불이(不二)'사상 등을 융합시킨 심오한 예술영화다.

인물관계의 뒤바뀜은〈주역>에서 밝히는 '물극필반(物極必反, 사물의 전개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한다)'의 변화원리와 상통한다. 우선 선악의 뒤바뀜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우환의 악함은 어릴 적 칭청이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갑옷 주인의 뒤바뀜은 신분의 뒤바뀜을, 칭청과 광밍, 쿤룬 간의 관계는 사랑의 뒤바뀜을 나타낸다. 그리고 생사의 뒤바뀜도 일어나는데 죽음이 두려워 우환의 노예가 된 꾸이랑은 동족 쿤룬을 위해 검은 망토를 벗으며 연기로 화한다.

반면 쿤룬은 검은 망토를 입음으로써 모든 경계를 초월해 생사를 바꾸고 시간을 거슬러 운명을 바꾼다. 쿤룬의 갈망은 운명을 바꾸는 힘이 된다. 선악, 음양 등 대립물들의 경계가 사라질 때 무극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그리고 우주는 다시 시작되며 해당화 꽃잎은 다시 흩날린다. 단테 〈신곡〉'천국'편을 연상시키는 엔딩 장면은 관객들에게 원초적 감동을 선사한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된 태초로의 회귀, 즉 무극으로의 회귀 본능에 기인한다.

안타까운 점은 상업적 요소들로 포장된 외형에 가려져 영화 속에 내포된 심오한 철학사상과 예술적 미학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천카이거 감독은 예술성과 상업성의 경계를 허물어 무극의 경지를 작품 속에 구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봉인된 시간을 열고 운명을 바꿀 순간이다.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