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인천 우국지사들, 백범 성장의 옥토가 되다

 

▲ 백범 김구 선생 /연합뉴스

 

 

▲ 김구 판결문 15년 징역(경성고소원. 1911. 09. 04.), 7년으로 감형(1912. 09. 13.).
▲ 김구 판결문 15년 징역(경성고소원. 1911. 09. 04.), 7년으로 감형(1912. 09. 13.).

 

▲ 김구는 투옥 5년 3개월 만인 1911년 8월21일 서대문감옥 인천분감에서 가출옥했다. 김구의 가출옥 기사를 실은 <조선총독부관보> 제926호.
▲ 김구는 투옥 5년 3개월 만인 1915년 8월21일 서대문감옥 인천분감에서 가출옥했다. 김구의 가출옥 기사를 실은 <조선총독부관보> 제926호.

 

▲ 강화도 사람 김주경이 법부에 제출한 김창수(김구) 석방 청원서.
▲ 강화도 사람 김주경이 법부에 제출한 김창수(김구) 석방 청원서.

 

▲ 처음 공개되는 김구 선생이 환국 후 강화도 김주경의 집을 찾아 쓴 편액 글 '동몽서실'
▲ 처음 공개되는 김구 선생이 환국 후 강화도 김주경의 집을 찾아 쓴 편액 글 '동몽서실'(김명성 소장)

 


스치다 사건 재판서 일본 순사에 호통
김주경 감복…전 재산 쏟아 석방 촉구
탈옥 후 방랑하다가 김주경 집서 기거
시천리 살던 유완무 만나 이름도 바꿔
장곶 주윤창 형제 도움받아 경성 활동



◆피체(被逮)와 해주감옥·인천감리서 고초
김창수가 황해도 신천 안태훈의 집을 거쳐 고향 집에서 머물고 있다가 피체(被逮)된 것은 1896년 6월21일(음력 5월11일)이었으니, 주한 일본변리공사 고무라(小村壽太郞)가 당시 외무대신 이완용에게 '살해범 체포'를 종용하는 서신을 보낸 지 약 3개월 만의 일이었다.

김창수는 큰칼을 쓰고 해주감옥에 수감되어 신문을 받고 있던 7월10일자 주 인천 일본영사관사무대리 하기하라(萩原守一)는 일본공사 하라(原敬)에게 보낸 문서에는 김창수의 신분을 '의병대장', '김 장군'이라고 하였다.

'스치다(土田讓亮) 가해자 조사완료 건'
위 혐의자로서 피해지 객사 주인인 이화보(李化甫)와 사실 참고인 오용재(吳龍在) 2인을, 수사를 위하여 출장한 당관 소속 순사가 당항(當港)에 동행을 구하여 도착한 후 바로 당부(當府) 관찰사에게 인도한 건은 전에 보고한 바와 같다. 그 후 당관에서는 경부 카미야(神谷淸)를 입회시켜 4, 5일간 계속 인천부에서 조사케 하였다. 그들의 구술이 매우 애매하여 요령이 모자랐다고는 하지만, 그 가해자는 강서군(강계군 오기-필자 주)을 습격한 의병대장 김창수(金昌洙) 외 4명이고, 이화보가 스치다(土田讓亮)의 소유재산과 한전 수표를 맡은 일은 전적으로 김 장군의 강제 명령에서 나왔다는 것만은 판명되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0권, '인천항의 정황 추가보고')

8월13일 김창수는 인천감리서로 이송되었는데, 피해자가 일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신문과정이 <백범일지> 9월2일(음력 7월25일)에 자세히 드러나 있으나 실제는 그보다 이틀 앞인 8월31일(음력 7월23일)에 인천감리서에서 있었다.

"네가 안악 치하포에서 모월 모일에 일본인을 살해한 일이 있느냐?"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구 한 명을 때려죽인 일이 있소."
법정 안이 조용해지자 신문과정을 지켜보던 일본인 순사 와타나베(渡邊)는 통역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는 듯하자, 김창수는 와타나베를 향해 호통을 쳤다.
"소위 만국공법이나 국제공법 그 어디에 국가 간의 통상·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했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으리라!"

1896년 9월12일, 일본영사관에서는 김창수에게 참수형을 요구하였고, 9월16일 인천감리서는 법부에 신문조서를 올렸으며, 법부는 10월22일 교수형을 주청하기에 이르러 마침내 교수형이 내렸으나 사형집행 직전에 국왕의 특사령이 전보로 전달되어 목숨을 구했으나 석방되지 못한 채 옥중생활을 이어갔다.

◆김창수의 은인 강화도 김주경·인천 유완무
김창수의 의연한 태도와 언행은 입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흠모했는데, 특히 강화도 사람 김주경(金周卿)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김주경은 '김창수가 강도·살인 죄인이 아니라 국모시해 복수를 한 것'이기 때문에 석방을 위해 법부대신 한규설(韓圭卨)을 만나기도 하고, 선처를 호소하는 청원서와 소장(訴狀)을 법부에 제출하자,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고 한 뜻은 가상하나, 사건이 중대하여 여기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답변이었다.

김창수의 석방을 위해 약 1년 동안 전 재산을 쏟아 붓다시피 한 어느 날 김창수 앞으로 김주경이 보낸 편지가 왔다. 문안인사와 함께 한시 한 수가 적힌 것이었다.

脫籠眞好鳥(탈롱진호조)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拔扈豈常鱗(발호기상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보통 물고기가 아닙니다.
求忠必於孝(구충필어효)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나니,
請看依閭人(청간의려인) 청하노니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김창수에게 탈옥을 권유한 것이었다. 김창수는 이 한시를 읽고서 그동안 자신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인 것은 고맙지만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답신을 보낸 후 1898년 3월19일, 김창수는 부친이 몰래 넣어준 쇠창을 이용하여 장기수 4명과 함께 탈옥하였으니,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처단한 지 2년 만이자 인천에서 옥중생활 1년 6개월 만이었다.

김창수는 삼남지방으로 도피 겸 방랑길에 올랐다. 전남 보성에서 은거생활도 하고, 공주 마곡사에서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고 승려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가을 부모를 뵙고 환속한 후 김두래(金斗來)라는 이름으로 강화성 남문 안에 산다는 김주경의 집을 찾은 것이 1900년 2월(음력)이었다.

김창수는 김주경을 기다리면서 그의 어린 아들(7세)을 비롯한 인근 아동 30여명에게 <동몽선습>, <천자문> 등을 가르친 지 3개월, 끝내 그의 안부를 알지 못한 채 부평부 모월곶면 시천리(현 인천 서구 시천동)에 살던 유완무(柳完茂)를 만나 그와 함께 전북 무주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유완무는 김주경의 벗으로 학식이 풍부하고 품격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의 제의에 따라 이름을 창수에서 구(龜)로 바꾸었다.

김구는 유완무의 소개로 강화도 장곶(長串)에 산다는 주윤창(朱潤昌)·주윤호(朱潤鎬) 형제를 찾아갔다. 형제는 김구를 반가이 맞으면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쓰라고 4000냥을 내놓았다. 김구는 이 돈을 지니고 경성으로 가서 많은 우국지사들과 교유했고, 1906년 황해도 신천의 서명의숙에서 교사, 안악의 양산학교, 재령의 보강학교 등에서 교장을 지내며 교육 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양기탁(梁起鐸), 이동휘(李東輝)이 등이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였고, 안중근의 종제 안명근(安明根) 등 24명과 함께 만주 이민계획과 함께 무관학교 설립을 하고자 황해도 송화·안악 등지의 우국지사들로부터 모금을 하던 중, 피체되어 신민회 건으로 2년 징역이 선고되었고, 이어 이른바 '안명근사건'으로 1911년 7월22일 경성지방재판소를 거쳐 9월4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되기에 이르렀다.

김구는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던 중, 인천 축항공사(인천항 제1부두)에 동원하기 위해 서대문감옥 인천분감으로 이감돼 노역에 시달리다 투옥된 지 5년 3개월 만인 1915년 8월21일 가출옥하였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郭樂園) 여사는 식모살이,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여 해주에서부터 옥바라지를 하면서 아들에게 용기를 준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김구는 출감한 후 유완무의 조카 유희강(柳熙綱)의 집에서 몸을 추스르고 조국 광복을 도모하고자 3·1만세시위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게 되었다.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은 고국으로 돌아온 직후 '김주경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연락하라'는 광고성 기사를 신문에 내었고, 지방순회를 할 때 제일 먼저 강화도와 인천을 찾았다. 그 후 몇 차례 더 강화도와 인천을 방문한 것은 의병좌통령 김창수를 석방하기 위해 전 재산을 탕진한 이가 강화도 김주경이요, 열혈 청년 김창수를 민족지도자 김구로 길러낸 자가 인천의 순국선열 유완무 때문이라면 지나친 것일까?

백범이 김주경 옛 집을 찾았을 때 그 터에는 1928년에 지은 '대명헌'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인과 제자들이 편액의 글을 요청하자, '동몽서실(東夢書室)'이라는 넉 자를 남겼으나 김주경의 옛 집을 복원하지 못했기에 그 글은 편액으로 볼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