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일해야했던 환경 바꾸고자 '투쟁의 삶' 자처

 

▲ 11일 연수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을 주제로 열린 2019년 인천 민속 문화의 해 특별전 갤러리 콘서트에 연사로 나선 이종화 씨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 11일 연수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을 주제로 열린 2019년 인천 민속 문화의 해 특별전 갤러리 콘서트에 연사로 나선 손원영 씨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 '피묻은 숟갈' 만들게 되는 고된 노동

위험한 기계 작업 탓 산업재해 잇따라

친구 "회사 바꿔보자" 말에 노조 설립

복직투쟁·원인불명 사고 등 우여곡절



● 이유없는 발령에 오기로 버틴 세월

1985년 노조 가담 이유로 창원 발령

2년뒤 인천으로 복귀 임금교섭 주도

노동자·회사 업무능률 동반상승 공헌



깊고 맑은 파란 무언가를 찾아 / 떠돌이 품팔이 마냥 / 친구 하나 찾아와주지 않는 이곳에 / 별을 보며 울먹이네
(김의철의 '저 하늘의 구름 따라' 중에서)

1970년대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포크가수 김의철 씨는 고등학생 시절 부모와 떨어져 사는 자신의 삶을 위로하기 위해 '불행아'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이후 이 노래는 1973년 발매 과정에서 유신 정권의 검열을 거쳐 '저 하늘의 구름 따라'로 제목이 바뀌기도 했다. 눈부신 '한강의 기적'과 달리 김씨의 노래는 너무 어둡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급격한 경제 발전의 뒷면에 있던 노동자 대부분은 춥고 외로웠다. 먹고살기 위해 '화려한 불빛'을 쫓아 도시로 떠나온 이들은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외로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해온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전한다.

그들은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감내하던 동료들을 위해 더욱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1980년대 인천 노동자들은 동료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했고, 이를 통해 인천에 민주노동조합의 꽃을 피워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격렬했던 1980년대 노조운동

11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진행된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 기획전시 연계행사의 네 번째 갤러리콘서트 주인공은 이종화 키친아트 노동자와 손원영 두산인프라코어 노동자다.

이들은 안정윤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와의 질의응답으로 '쇠'를 다루는 위험한 노동현장에서의 기억을 풀어냈다.

이 가운데 인천 서구 가좌동에 위치했던 경동산업 주식회사는 열약한 노동환경으로 유명했다.

경동산업은 1960년부터 숟가락·젓가락 등 양식기를 만들어온 주방 기구 전문 생산 기업으로, 박노해 시인이 '손무덤'에서 다룬 산업재해 사고의 대표적인 배경이다.

이후 1994년 법정관리가 시작되면서 퇴출 명령을 거쳐 2001년 288명 직원 주주로 이뤄진 '키친아트'로 재탄생했다.

"틀을 찍어내 수저 형태를 만드는 프레스기 작업에서는 철판을 잡는 손의 여유 간격은 2mm 가량에 불과합니다. 노동자들 대부분 클러치에서 발을 거의 떼지 않고 1초에 2개씩 숟가락을 만들었습니다. '피 묻은 숟갈'이란 말이 절대 지나치지 않았죠."

1987년 충남 논산 고향을 떠나 경동산업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종화 씨는 현장의 열약한 노동환경을 여전히 기억한다.

주·야간 2교대로 일했던 노동자들은 심할 경우 한 달간 170시간씩 일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일했던 노동자 10명 가운데 3~4명은 손가락 한 마디씩이 없다고 말했다.

자연스레 1980년대 민주노조 설립운동의 열풍은 경동산업 내부에도 이어졌다.

1984년부터 수차례 실패로 돌아간 노조운동에 이씨가 뛰어든 것은, 먼지가 가득한 공장에서도 늘 최선을 다하던 친구 최웅씨의 권유 때문이었다.

"시력이 나쁜 최웅이란 친구는 회사 방침 때문에 뿌연 공장 안에서 항상 렌즈를 끼고 일했습니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1988년쯤 '회사를 한 번 바꿔보자'라고 그 친구가 제안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갈 생각이었지만 몇 달이나 일 년 정도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민주노조를 만드는 길은 멀고 험했다. 어용노조를 대신해 노동자 친목단체 '디딤돌'을 중심으로 직원 상담 등이 이뤄졌으나, 회사에선 각종 빌미를 잡아 디딤돌 소속 노동자를 해고하는 탄압을 이어갔다.

1989년 이웃돕기 일일주점을 계기로 강현중 디딤돌 회장 등이 해고되면서 노동자 20여명은 사무실 점거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복직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투신·분신 등 극단적인 위협 수단이 동원되는 가운데, 발화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로 노동자 2명이 세상을 떠나는 사고도 일어났다.

당시 이씨도 화상을 입어 4개월 넘게 입원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후 노조운동이 계속되던 가운데 경동산업은 부도 처리됐고 노동자들은 키친아트를 다시 만들었습니다.그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면서 저는 회사를 그만뒀다가, 이후 신임 대표이사 횡령·구속 사건 이후 다시 복귀해 지금은 신제품 개발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로서의 삶은 여전한 나의 자부심"

최근까지도 두산인프라코어 지회장으로 활동한 손원영 노동자도 결코 산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먹고 살 걱정에 인천공업중고등학교에 다녔다는 그는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동료에게 일어난 사고를 직접 목격했다.

"동구 송림동에 위치한 우아미가구에 근무할 때 함께 일하던 형님의 잘린 손가락을 주워준 일이 있습니다. 회사 의무실에서 인근 제물포백병원으로 보냈으나 '기술이 부족해 접합 수술이 어려우니 손가락을 버리라' 하더라고요.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훈련원에서 선반 기술을 배웠습니다."

이후 1984년 손씨는 당시 대우중공업(두산인프라코어의 전신)에 입사했다.

당시 대우중공업은 선박, 탱크 등 방산제품과 중대형 산업차량에 들어가는 대형엔진을 주로 만들었다.

그는 엔진사업부 가공라인에서도 대형엔진 부속 드릴 공정을 담당하는 핵심 부서에서 일했다.

하지만 노조활동에 관심이 많은 손씨를 회사에선 가만두지 않았다.

1985년 그는 인천에서 창원 공장으로 보내졌다.

그가 군대를 가지 않아 방위산업체였던 대우중공업에서 5년을 꼼짝없이 일해야 했던 만큼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회사는 이 같은 사정을 알고 연고도 없던 지역으로 그를 내려보냈다.

"창원으로 쫓겨가니 오기가 더 생겼습니다. 자취방을 근거지로 노조활동을 했습니다. 2년 정도 지나니 '노동자들을 물 들인다'며 인천에 다시 쫓아보내더군요. 앞서 1986년 5·3항쟁이 일어났던 인천에선 민주노조운동이 더 활발해진 상태였습니다. 1987년 인천 공장으로 복귀해 매년 임금교섭 과정에서 목소리 내며 열심히 활동했죠."

손씨는 여전히 현직에서 노동자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 노조가 좋은 회사를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집단 난청 노동자 요양신청, 명절 귀향버스 증차, 합동결혼식, 가족 초청 공장견학 등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은 물론 회사를 위한 작업 능률에도 기여했다는 설명이다.

"1993년 지역 예선을 거쳐 올라간 전국 품질관리경연대회에서 제가 소속된 팀이 대통령 이름이 새겨진 금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노조활동을 활발히 하면서도 회사에 공헌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사례죠. 그래서인지 대우중공업 시절엔 김우중 회장이 직접 노사 교섭에 참여하는 등 대화도 원활했습니다."

/김은희 기자 haru@incheonilbo.com
 


 

▲ 이종화
▲ 이종화


이종화는

30년 넘게 회사지킨 노동운동 산증인


이종화 씨는 1964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해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서울 도봉구에 위치한 나염공장을 시작으로 노동자로 살기 시작했다.

서울에 상경해 청계천 연탄지계, 문래동 폐차장 부품 판매 등 여러 일을 전전하다 우연히 친구 때문에 방문한 인천에서 경동산업에 입사할 기회를 얻었다.

1987년부터 경동산업에서 숟가락에 광을 내는 '멜라민 연마실'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다 1988년 친한 동료의 권유로 노조활동을 시작해 1992년 복직 투쟁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99년 노조 내부의 불화로 사표를 냈다가, 회사가 어려워지고 노조가 퇴직금을 담보로 키친아트를 설립하면서 재입사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부산사무소로 발령받았다가 사업장이 폐쇄되는 일들을 겪으며 회사를 다시 그만두는 우여곡절은 계속됐다.

결국은 대표의 횡령·구속을 계기로 다시 복귀했다가 한 차례 해고복직투쟁을 겪은 뒤 2012년부터 키친아트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

/김은희 기자 haru@incheonilbo.com
 

 


 

▲ 손원영
▲ 손원영

 


손원영은

최근까지 위원장 활동한 '영원한 현역'


손원영 씨는 1963년 충남 아산군에서 네 형제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돈벌이를 위해 인천으로 이주하면서 1971년 만수초등학교로 전학해 인천에서 쭉 살게 된다.

1976년 인천공업중고등학교에 입학해 전자통신과를 전공했으며 이후엔 우아미가구, 서울엔지니어링 등 여러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다 1984년 선배의 제안으로 대우중공업에 원서를 내고 근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노조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1년 만에 창원공장으로 쫓겨났다가 1987년에서야 인천에 다시 복귀했다.

이후엔 '대우중공업 투쟁' 등에 적극 동참하며 활발한 노조운동을 전개했다.

지금까지도 자신의 자부심인 '작업복'을 늘 입고 다니며, 두산인프라코어 노조위원장 등 임원으로 장기간 활동하고 있다.

/김은희 기자 haru@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