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했던 영토만큼 … 바다 너머 끝없던 공격

고구려가 가장 중요시한 땅은
중계무역 요충지 '랴오둥반도'
지키고자 176개 성 쌓아올려

집요하게 넘보던 수나라는
4차례 전쟁 치르다가 자멸

이후 침입한 당은 혼쭐냈으나
신라 협공에는 버티지 못해





고구려는 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대를 거치며 최대의 영토를 개척했다. 한반도 북부와 중국의 동북 3성 및 산하이관을 넘어 허베이성을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영토임에도 고구려가 가장 중요시한 지역은 랴오둥반도였다. 랴오둥반도는 만주지역과 내몽골지역에서 생산되는 말과 동물들의 가죽, 각종 약재 등을 중원지역으로 전달하고, 중원지역에서 생산되는 곡식과 각종 공산품들을 북방지역으로 전달하는 중계무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계무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육군뿐 아니라 수군이 강해야 한다. 랴오둥반도는 발해를 사이에 두고 중원으로 통하는 산둥반도와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요충지인 랴오둥반도를 지키기 위하여 176개의 성을 쌓았다.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적들을 막아내고 압록강 하구를 통한 내륙 침투를 차단하는 방어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수나라는 중원통일에 만족하지 않고 천하통일(大一統)을 내세웠다. 이를 위해 중앙집권적인 황제지배체제를 강화했다. 아울러 통일제국의 수도인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교통망을 구축했다. 육로는 물론이고 양제 때에는 항저우(杭州)에서부터 베이징(北京), 장안을 관통하는 대운하를 완성하였다.

수나라는 이제 본격적인 대일통을 완성하기 위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동북아시아의 강자인 고구려도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었다. 598년, 고구려가 요서지역의 거점인 영주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수양제는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시키기 위해 전군을 요동반도에 집결시켰다.
고구려와 수는 614년까지 4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렀다. 수양제는 전국에서 육해군 총 113만여명의 군사를 동원시켰다. 임유관에 집결한 육군은 유성과 요하를 거쳐 평양성으로 진격하는 것이다. 수군은 산둥반도 동래(東萊)에서 출발하여 묘도열도를 따라 북상하여 요동반도에 이르는 것이었다. 장마철에 개시된 이 전략은 풍랑과 전염병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아니 '죽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에 이르는 처절한 패배였다. 살수에서의 패배보다 더한 것이었다.

연속되는 패배에도 수양제는 집요했다. 4차 원정에서는 랴오둥반도 남단에 있는 고구려의 요충지인 비사성(卑沙城)을 격파했다.

하지만 그뿐, 내부에서의 자중지란으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재정적 파산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수나라는 대일통을 부르짖으며 호전적인 정책을 편 결과 부메랑이 되어 날아온 활과 창에 스스로 침몰하고 만 것이다.

고구려의 비사성은 랴오둥반도 진저우(金州)시에서 동북으로 20㎞로 떨어진 대흑산에 있다. 이 산은 660여m에 이르는데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가파른 절벽을 올라 정상에 오르니 여름임에도 한기가 느껴진다. 비사성은 산 정상부근에 둘레 5㎞로 구축되었다. 이곳에서는 남쪽으로 다롄(大連), 진저우의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바다로 침입하는 적군을 감시하고 내륙으로의 침입을 차단하는 요충지였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대규모 공격에 대항하여 선제공격과 화전(和戰) 양면전술, 첩보 및 기습전 등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도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645년, 당태종은 고구려의 안시성을 침공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는 혼쭐이 나고 철수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원정에 대한 미련은 버릴 수 없었다. 과거시험에서도 고구려정벌에 대한 의견을 물을 정도였다. 당태종은 수나라 때와 자신의 뼈아픈 실패경험을 통해 새로운 고구려 원정전략을 세웠다. 그것은 소규모 부대를 투입하여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장기전과 지구전을 함께 펼치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방어력은 예전처럼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대규모 군사의 공격도 이겨냈던 방어력이지만 이제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하지만 70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고구려군의 방어력도 급격히 소진되었다. 게다가 고구려 후방의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협공을 하자 고구려는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이다.
 


 


 


누가 적국의 멸망을 아름답게 다룰까 … 고조선 끝을 담은 '사기' 냉철히 읽자

 

▲ 랴오둥반도 남단 노철산 기슭에 있는 고조선 '목양성터'
▲ 랴오둥반도 남단 노철산 기슭에 있는 고조선 '목양성터'

 

사마천의 <사기>에는 '조선열전'이 있다. 이 열전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인 위만조선의 멸망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위만조선은 철기문화를 가지고 주변의 요충지를 정복하고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한 무제는 서쪽의 흉노를 정벌한 것처럼, 동쪽의 고조선을 정벌하여 교역로를 확장하고 싶었다.

이에 사신 섭하가 고조선의 관리를 살해하자 고조선은 군사를 동원해 섭하를 죽였다. 무제는 이를 빌미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기원전 109년의 일이다.

무제는 5만여명의 병사로 수륙 양동작전을 폈다. 수군은 산둥의 등저우에서 출발했고, 육군은 허베이와 산시성에서 소집했다.

한나라는 엄청난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전세가 순조롭지 못했다. 오히려 고조선의 방어에 이렇다 할 전과를 낼 수 없었다.

무제의 호령은 계속되고 수군을 이끄는 누선장군과 육군을 이끄는 좌장군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이대로 가다간 전쟁의 공훈은커녕 벌을 받을 지경이었다.

전쟁은 1년 넘게 진행되었다. 고조선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결국, 패배의 불안함에 눌려 내분이 발생했다.

우거왕이 살해되고 그의 신하인 성기마저 주살 당하면서 고조선의 왕검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한 무제는 그곳에 4군을 설치하였다.

랴오둥반도 남단의 노철산 기슭에 있는 고조선의 목양성터는 잡초 밭으로 변했다.

표지석을 찾지 못했다면 이곳이 성터였는지도 모를 정도로 황폐하다. 그날의 편린은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져버렸는가.

사마천의 조선열전을 보면, 역사임에도 한 편의 소설처럼 읽힌다.

고조선의 반란과 그 결과에 이르는 모든 사항들이 마치 그렇게 될 것처럼 예견되는 복선들이 나타난다. 이는 어찌된 영문인가.

사마천은 <사기>를 저술함에 있어 '자신이 창작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가지런히 정리만 한 것(述而不作)'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수 없다. 사마천은 고조선과의 전쟁이 끝난 후 작성한 조사보고서를 보고 조선열전을 지었다.

한나라 위주로 작성된 보고서는 전쟁의 정당성과 반란으로 일컬어진 고조선의 진압에 모든 것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물론 한 내부의 패배나 잘못은 은폐되거나 삭제되었을 것이다.

이는 비단 조선열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마천의 사기를 보다 냉철하게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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