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폭氷瀑

-배영-

더 낮아질 곳이 없는,
멈춰버린 극저온의 벽
망연히 섰다
어떤 연속성이 잠시 쉬고 있는 풍경
그 정지한 빙벽에
몇 명의 빙벽등반가들이 매달려 있다
쉬고 있는 풍경을 간신히 올라가는
저 진행성
극한을 놀고 있다

사람으로 식물의 연대기에
몇 년을 매달려 있는 등반
얼어붙은 저 깊은 속, 실낱같은 흐름이 있다
언젠가는 자일이 끊어지듯
흐르는 물줄기 하나 뚝 끊어질지도 모르지만
주렁주렁 달고 있는 등반장비처럼
코와 입에 매단 생명유지 장치
극한이란 원래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죽지 않으려고 혹은 살지 않으려고
조금씩 간신히 움직인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짐승처럼
저의 속을 끝끝내 봄까지 감추려고
험악하게 얼어있는 빙폭
그러나 가만히 귀 기울이면
갓 녹은 것인지 아니면
얼기 직전인지 모를 물소리 들린다.
아직 맑은 핏줄 하나 살아있다

가느다란 연속성
어느 날 툭, 멈춰 설지도 모른다.



▶허공에서는 온 몸이 자유롭다. 온 몸의 감각이 살아 있고 아주 가느다란 숨결에서조차 그 깊이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허공이 빙폭이라면? 험악하게 얼어 있는 빙폭. "더 낮아질 곳이 없는 멈춰버린 극저온의 벽"에서 시인은 갓 녹은 것인지 얼기 직전인지 모를, 아주 맑은 핏줄 하나에 귀 기울인다. 극한에서 세계의 밑바닥과 만나는 시인의 상상력은, 그래서 더 아찔하고 더 직접적이다. 어둠이 세상의 밝은 면을 도드라지게 하듯이, "어느 날 툭, 멈춰 설지도 모르는" 가느다란 삶의 연속성에서 시인은 존재와 생명의 가치를 발견한다. "흐르는 물줄기 하나 뚝 끊어질지도 모르"는 신산한 실존의 상황에서도, 생의 가장 깊은 심연에 묻혀 있는 신생의 감각들을 꺼내 눈부신 순간의 충만함으로 바꾸어 낸다. 그래서 "극한을 놀고 있다"는 삶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얼마나 자유로운가.

/강동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