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재 구조물에 걸려 있는 답동성당 종들.


보름 전, 날 좋은 어느 날 오후 2시 박재윤 인천대 교수와 함께 답동성당 종탑 꼭대기에 올랐다. 공대 교수이면서도 인천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그는 1948년 11월 미군이 답동성당 종탑에서 찍은 파노라마 컬러 사진을 핸드폰에 저장해 갖고 다닌다. 기어코 그는 성당의 협조를 얻어내 같은 계절 비슷한 시간(그림자를 보고 추정)에 8개의 기둥이 세워진 중앙 종탑 위에 나와 함께 올랐다.

인천에 주둔했던 파란 눈의 한 병사는 날 좋은 늦가을에 성당 종탑에 올라 셔터를 눌렀다. 당시 인천에는 답동성당을 능가할 만한 높이의 건축물은 없었다. 그가 담은 70여 년 전의 사진과 현재의 실루엣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파트, 빌딩 등 스카이라인만 변했을 뿐 월미도, 자유공원 등 인천의 바디라인은 그대로다.
사방팔방으로 탁 트인 종탑 위 풍경도 일품이었지만 종탑실에 있는 3개의 종도 귀한 볼거리였다. 인천 해관원이며 가톨릭 신자였던 우리탕(오례당) 부부 등의 기부금으로 프랑스에서 제작해 국제화물선으로 들여와 1900년 4월 축성한 종들이다. 120년 세월을 품은 종들이다. 이 종들은 일제 말에 강제 공출돼 무기가 될 뻔했다. 해안동 쪽과 숭의동 쪽에 설치하여 비상시 타종용으로 사용하자는 주임 신부의 '기발한' 제안으로 조병창 행을 가까스로 면했다.

한때 성당만종(답동성당의 저녁 종소리)은 '인천 8경' 중 하나로 꼽혔다. 종교를 떠나 특별한 날, 이를테면 한 해의 마지막 날, 인천시민의 날, 아니면 SK와이번스 우승한 날에 인천 곳곳에서 성당, 교회, 사찰의 종소리가 함께 울려 퍼지는 상상을 해본다. 은은한 소리(청각)를 아름다운 풍경(시각)으로 감상하며 즐겼던 옛 인천인들의 여유와 풍류가 부럽다.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