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맨땅 위로 민중미술 꽃 활짝

 

▲ 1988년 맥스테크 여성노조의 올해의 여성상 수상을 기념하기 위해 여성미술연구회가 제작한 작품.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미술패 갯꽃에서 활동할 당시 제작된 정정엽 작가의 판화 작품 '잔업없는날'.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일그림 동인'·'일손나눔' 결합 통해 탄생
87년 6월 항쟁·노동자 대투쟁 적극 개입
깃발 제작·강습으로 노동·시민운동 지원
인천 최초 노동벽화 '한독민주노조' 작업


민중미술은 투쟁과 항쟁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느 특권층의 전유물은 더더욱 아니다. 교육, 노동, 여성 등 총체적인 우리네 삶 전반에 질문을 던지고, 온전히 시민들의 것이 되는 미술을 '미술패 갯꽃'은 민중미술이라고 정의했다. 갯벌에도 꽃은 피어난다. 미술패 갯꽃은 척박한 삶의 현장에 한 송이 민주화 꽃을 피우기 위해 뛰어들었다.


시점·시점_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
기간 : 2019년 10월29일~2020년 2월2일
장소 : 경기도미술관 2층 기획전시실(안산시 단원구 동산로 268 화랑유원지 내)



미술패 갯꽃은
갯꽃은 갯벌에 피는 꽃이다. 꽃은 문화를 상징하고 갯벌은 인천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척박하고 맨땅'의 의미가 담아 지어진 명칭이다. 1980년대 후반 '일그림 동인'이 먼저 활동을 하고 있었고 인천노동자 문화기획 '일손나눔'이 합쳐지면서 갯꽃이 생겨났다. 이들은 주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투쟁대회 등에 필요한 깃발 그림을 제작했고 파업기간 중 현장에 필요한 노동조합의 문화프로그램을 지원했다. 판화교실, 플랜카드 강습 등이 주로 이뤄졌다. 갯꽃과 가는 패,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인천 최초의 노동벽화인 '한독민주노조(1988)'를 부평공단 공장 외벽에 공동창작했다.



연대기
창립년도:1987년으로 추정
창립멤버:허용철, 인천대 미술대학 학생, 최진희, 정정엽

1987. 허용철과 인천대 미술대 학생들이 조직한 '일그림 동인'과 정정엽이 이끌던 '일손나눔'이 결합하면서 '미술패 갯꽃' 창립
1988. 김경희, 이성강, 안혜진 합류
1988. 인천 최초의 노동벽화 '한독민주노조' 창작
1989. 최진희, 정정엽만 남아서 활동을 이어감

 



선언서(활동 내용)
1987년 결성된 갯꽃의 전신인 '일손나눔'은 풍물, 노래, 미술 등 각 장르가 분화되지 않은 노동조합운동의 문화적 지원 활동을 목표로 한 문화운동조직이었다. 일손나눔의 활동공간은 제물포역 북부 광장의 왼편 골목 안(남구 도화동 80-25)이었다. 일손나눔을 비롯한 여러 문화운동 조직들은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노동자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고, 노동조합 설립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문화운동 활동가들은 보다 조직적으로 민주노조운동 지원 필요성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조직통합을 결정하게 됐다. 일손나눔은 1988년 4월에 한광대 산하, 갯꽃 등으로 조직을 합치면서 '우리문화사랑회'로 발전하게 됐다.
 


 

[시대 고발자 _ 미술패 갯꽃 정정엽]

"사명감·부채감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 정정엽 작가가 자신의 판화 작품 '올려보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정정엽 작가가 자신의 판화 작품 '올려보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어쩌면 누구를 위한 활동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한 활동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무엇으로라도 발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시기였거든요. 저는 작가이면서 시민이고 여성으로서 자존적인 미술을 해야 했습니다."
인천 미술패 갯꽃의 멤버였던 정정엽 작가는 12일 왕성한 민중미술 활동을 하던 예나 페미니즘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지금이나 여성주의 미술을 통해 여성문제를 사회문제로 확장시키고 있다.

정 작가는 최근 '최초의 만찬'으로 '4회 고암 미술상'을 수상했다. 근사한 성찬과 예수 그리스도 주변으로 12명의 제자가 그려진 레오나르도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정 작가의 작품 속에서는 트렌스젠더 여성, 평화의 소녀상, 나혜석 시인, 서지현 검사가 등장하는 '최초의 만찬'으로 탄생했다. 만찬이라는 공식 석상에 '왜 여성이 없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한 정 작가는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을 화두로 던진 인물들을 만찬 자리에 초대하는 것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정 작가는 1980년대 격동의 시대 속 노동자들과 여성들의 문제를 다루고 목소리를 대변해온 여성주의 작가다. 당시 미술동인 두렁 활동을 시작으로 미술패 갯꽃과 여성미술연구회를 창립하며 인천지역 민중미술 소집단 활동에서 중추적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미술동인 두렁에 처음 발을 들인 해와 같은 1985년 '터' 그룹을 조직했다. '터'그룹은 이화여자대학 출신의 여성 작가 6인이 모여 만든 소그룹이다.

"여성들의 미술 활동이 두드러지지 못했던 시기였어요. 여성 작가로서 앞으로 활동하려면 여성미술그룹이 필요하다는 관점이었죠. 이후 김인순, 김진숙, 윤석남 3인의 40대 경력단절 여성 작가들이 만든 '시월모임'을 만나면서 '여성미술연구회'가 탄생하게 됐습니다."

이들은 여성미술연구회라는 명칭 이전에 '민미협 여성미술분과'라는 이름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그러나 다분히 봉건적인 이름과 민주화 이후에도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1988년 '여성미술연구회'로 변경했다. 이들은 '여성과 현실전'을 기점으로 '여성주의 미술'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면서 여성의 문제들을 사회의 문제로 확장시켰다.

여성미술연구회 활동을 하는 동시에 노동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던 정 작가는 성효숙, 양은희 등과 함께 공단 밀집 지역인 인천의 한 공장에 취업하며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동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대학을 다녔다는 것은 특정 계층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같은 것이었어요. 제가 노동운동에 적극 나섰던 것 역시,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척박한 노동 현장을 알게 됐을 때 오는 부채감 같은 것들이 혼재되면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인천으로 내려와 '미술패 갯꽃'에 합류하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86년도부터다. 정 작가는 다니던 공장을 나와 '일손나눔'을 조직했다. '일손나눔'은 인천노동자문화기획 단체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활동하던 미술패였다. 두렁이 결성되고 각 인천(밭두렁)과 수원(논두렁)지역으로 산파될 시기 일손나눔과 허용철이 대표로 있던 '일그림 동인'이 합쳐지면서 갯꽃이 탄생하게 됐다.

"갯꽃은 지역의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죠. 전시도 하고 판화도 제작했고 지역에서 현장을 지원하는 미술 활동이 주가 됐습니다. 노조 활동에 필요한 걸개그림을 그리거나 깃발을 제작하는 일을 하면서도 장기화 된 운동에 문화프로그램을 형성하고 노래교실을 여는가 하면 판화교실을 열기도 했습니다. 인천은 특히나 노동운동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했기에 활발한 소집단 활동이 이뤄진 곳이기도 하지요."
이번 시점·시점_아카이브 전시회가 정 작가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1985년 당시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전시, '힘전(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에서 불법 선전물 취급을 받으며 경찰에 빼앗겼던 정 작가의 작품이 최초로 공개됐기 때문이다.

"힘전은 민족미술협의회가 출범하는 계기가 된 전시회입니다. 당시 불온하다는 이유로 작품들은 빼앗겼고 강제적인 탄압이 이뤄졌었죠. 그들은 뭐가 무서웠는지 힘전에 출품한 작품들을 노동자들이 행여나 볼까 노심초사했죠. 작품이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에 매우 반가웠습니다. 마치 죽은 줄로만 알았던 딸이 살아 돌아온 기분이었달까요?"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