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위원

이달 초 중국 상하이에서 큰 자동차 부품 전시회가 열렸다. 인천 업체들도 공동 홍보관을 마련했다. 그런데 옛 대우그룹의 은행잎 로고와 영문이름 'DAEWOO'를 크게 내걸었다. 멀리 중국에서 '대우'가 깜짝 되살아난 것이다. 인천 부품업체들은 옛 대우자동차와 함께 컸다. 과거 '대우' 브랜드는 해외에서 더 알아줬다. 세계 곳곳에 대우차 생산기지가 있었다. 중국 시장에 어필하려 대우의 글로벌 이미지를 잠시 차용한 셈이었다.

그런데 이 뉴스가 뜨자마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음이 전해졌다. ▶"청년들이여 밖으로 나가라." "우리 세대가 희생해야 다음 세대의 미래가 열린다." … 한 기업인의 생애가 이토록 많은 얘기를 자아낸 적이 있었던가. 그의 '샐러리맨 신화'는 1970년대 제세그룹, 율산그룹 등 '김우중 키즈'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1980년대 말 노동자 대투쟁 시기, 기업인은 모두 나쁜 사용자로 치부됐다.

그러나 김우중은 좀 달랐다. 부평의 대우자동차에도, 거제의 대우조선소에도 분규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당시 그의 야전침대는 쇼를 위한게 아니라 그의 인생 소품이었다. ▶1990년대 중반 중유럽의 한 도시에 머물며 그의 '세계경영'을 직접 목도한 적이 있다. 범 독일어권인 동유럽에서는 'DAEWOO'를 '다보' '다에오' 등으로 음역해 불렀다. 어느날부터 독일 TV에 '5000만 달러'짜리라는 대우 광고가 등장했다. 화면에는 여성 모델의 입술만 보인다. 'DAEWOO'를 어떻게 발음하는지를 입술 움직으로 보여줘 곧 화제가 됐다.

그곳 유학생이던 후배가 김우중 회장의 통역사로 루마니아 대우에 특채됐다. 김 회장은 공항에서 바로 대통령궁으로 직행하곤 했다고 한다. 전광석화처럼 국영 자동차공장을 인수해서는 르망을 생산해냈다. 로마니아와 대우에서 한 글자씩 따 이름 지은 '로대자동차'였다. 당시 김우중 회장은 유독 걸음이 빨랐다고 한다. "호기심이 너무 많고 바둑을 두듯 수를 멀리 내다봤다"고도 했다. ▶그런 그의 영결식이 지난주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있었다. 좌석 300개에 2000여명이나 몰려 눈물로 그를 보냈다고 한다. 대리·과장으로 대우를 나온 이들조차 아직도 "나는 대우맨"이라며 자긍심을 내보인다. '킴기츠칸'이라 불리며 영욕의 한 시대를 질주했던 풍운아.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He was not a big man, but he was a BIG MAN. (그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큰 사람이었다)" 빅맨은 하나 둘 떠나고 스몰맨들만 남아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드는 시대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