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억만으로 가득한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나쁜 기억만으로 가득한 사람도 없다. 보통은 그렇다. 모든 사람들은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들이 섞여 있다.

연구에 따르면 현재의 무드에 따라 과거의 기억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우울한 무드일 때 부정적 생각을 더 많이 하고, 그 부정적 생각은 우울한 무드를 더욱 강화하고 지속시킨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우울 상태에 더 빠지는 이유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긍정적 자극과 부정적 자극을 모두 주게 되면 나중에 긍정적 자극보다 부정적 자극에 대한 정보를 더 쉽게 획득하고 기억한다. 문제는 우울한 사람들이 부정적 경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경험만 생각하는 것에 있다.

어떤 사람은 슬픈 엔딩의 영화는 절대 보지 않는다고 한다. 삶도 우울한데 영화까지 우울한 영화를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극장에 가기 전에 영화의 엔딩이 비극인지 아닌지를 반드시 확인한다. 어쩌면 이 사람은 자신의 취약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자신의 상태를 일정한 수준으로 관리하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부모에 대해 부정적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이 다 우울증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우울증이기보다 부모와 갈등 관계가 오랜 시간 해소되지 않으면서 갈등 에피소드가 주로 떠오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섭섭했던 것을 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 어머니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어떤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여성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너무 크다보니 자신의 증오를 감당할 수 없어 억압한다. 억압으로 충분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 부모에 대한 커다란 증오는 죄책감을 이끌고 거기에 대한 방어로 강한 반동형성을 할 수 있다. 부모에 대한 과도한 사랑으로 자신의 증오를 감추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염려하고 극진하게 대한다.

부모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이나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 모두 일반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사랑과 증오는 언제나 같이 가기 때문이다. 사랑과 증오는 극단적이기에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지만 둘은 밀접하게 붙어 있다. 어머니에 대한 강한 비판과 불평만 하는 사람은 사실 어머니에 대한 강한 애정 욕구가 있을 수 있다.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 이야기만 한참 하던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아주 어릴 때 어머니가 자신을 데리고 장에 갔던 일을 기억했다. 장에 갈 때면 자신에게 먹을 거와 머리핀 같은 것을 사준 일을 회상하며 스스로 놀라워한다. 어머니와는 좋은 일이 전혀 없었다고 오랜 시간 믿었던 사람이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그런 좋은 기억의 작은 조각이다. 우리가 그 작은 조각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필요할 때마다 기억할 수 있다면 말이다.

양혜영 한국정신분석상담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