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해고에 맞선 외로운 싸움 … 끝내 승리한 '오뚝이'

 

▲ 14일 오후 인천시 연수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갤러리 콘서트 '저 너머 철가루 구름 흘러가던 곳, 인천'이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다.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 1992년 회사 복직 이후 노조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발간한 자료집./자료제공=국립민속박물관
▲ 1992년 회사 복직 이후 노조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발간한 자료집./자료제공=국립민속박물관

자동차산업 호황 이끈 자부심 뒤엔
야근·산업재해 등 어두운 이면 공존


일방적 임금동결에 반발하다 해고
함께 해직된 동료·자녀 생각에 투쟁


'법률 동냥'하며 홀로 법정싸움 시작
2년만에 대법원 무효 확정판결 받아



"전쟁 같은 밤일을 / 마치고 난 /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찬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 오래 못가지 / 이러다간 / 끝내 못가지
설은 세그릇 짬밥으로 / 기름 투성이 체력전을 / 전력 다해 바둥치는 / 전쟁 같은 노동일
오래 못가도 / 어쩔 수 없지 / 끝내 못가도 / 어쩔 수 없지"

(박노해의 시 '노동의 새벽' 중에서)


노동자 시인 박노해는 1984년 '노동의 새벽'을 발표한다.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란 문구를 들고 나온 그의 나이는 겨우 27살. 청년 노동자였던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이 겪은 불합리한 노동 현장을 고발했다.

이후 30여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는 노동 현장의 열악함을 목격하곤 한다.

지난해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목숨을 잃은 김용균씨부터, 2016년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승강장에서 사망한 김군까지.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삶을 짓누르는 위험한 노동 현장의 모습을 체감한다.

인천 부평국가산업단지에서 청춘을 보낸 박남수(74) 선생에게도 현장은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일은 늘 자부심인 동시에 '스스로의 생명을 갉아먹는' 과정처럼 보였다고 설명했다.

그가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코리아스파이서㈜에서 27년간 일하며 청춘을 되돌아본 결과다.

하지만 그가 노동 현장에서 보낸 시간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줬다.

이전까지 허울뿐이었던 노동법을 싸울 수 있는 무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10년간 이어진 나 홀로 법적 투쟁으로 회사에 다시 돌아왔다.

그저 부끄럽지 않은 아빠와 동료이고 싶었다는 박 선생의 노동운동 일대기를 돌아본다.
 

 

 

농성을 이어가던 가운데 내부 생산품들을 살펴보고 있는 박남수. /자료제공=국립민속박물관<br>
▲ 농성을 이어가던 가운데 내부 생산품들을 살펴보고 있는 박남수. /자료제공=국립민속박물관

"코리아스파이서에 막 입사했을 즈음, 도로변 바로 옆 셋방에 살았습니다. 아침에 퇴근해 거리에 번데기 장사가 소리를 '뻔! 뻔!' 지르는 걸 들으면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안주없이 소주를 두어 잔 먹고 수면제 삼아 잠을 자다, 나중엔 한 병을 다 먹고 취해서 잠들기도 했어요. 피곤하지만 술을 안 먹고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죠."

지난 14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세 번째 갤러리콘서트의 주인공은 1980년대 노동운동의 전설, 박남수 선생이다.

그는 시립박물관에서 '2019 인천민속문화의해'를 맞아 진행 중인 '메이드 인 인천-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 특별전시회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이날 국립민속박물관의 '메이드 인 인천' 행사를 주도했던 안정윤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와의 질의응답으로 행사가 진행됐다. 박 선생은 당시 노동 현장에서 겪었던 야간근무·산업재해 등을 뼈아프게 회상하면서도 자동차 호황기를 열었던 부평 노동자의 자부심도 내어 보였다.

"우리 회사는 엔진에서 바퀴까지 전달되는 동력전달장치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대우중공업 엔진과 조립해 대우자동차를 완성했죠. 인천 자동차 대부분을 우리 회사가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회사에 대한 자부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80년 '서울의 봄'과 시작된 노동조합 설립운동과 함께, 코리아스파이서에도 노조가 만들어지면서 박 선생은 부위원장으로 참여하게 됐다.

이후 1982년 회사와의 임금협상 과정에서 비합리적으로 '임금 동결'이 결정되자 그는 회사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2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물가상승률이 계속 올라가자 전국에 '임금 동결' 지침을 내린 상황이었다.

"갑자기 노조위원장이 사장의 뜻에 맞춰 임금 동결을 선언하고 협상을 해버렸습니다. 노조가 입수한 회사 기밀 자료에서는 '임금을 17% 올려줄 것'이 명시돼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며칠 뒤 회사는 '임금을 자체 동결한 모범적인 노동현장'으로 저녁 뉴스에 등장했습니다."

결국 같은 해 4월 박 선생은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한 번도 내쫓겨본 적 없던 그는 한동안 어쩔 줄 몰라 집에 박혀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박 선생을 밖으로 내보낸 결정적 계기는 아이들의 대화였다.

"아빠 왜 출근 안 해?"라는 딸의 물음에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들이 "아빠가 해고됐다"고 답한 것이다.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쯤 회사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라는 이유로 내쫓기던 노동자들도 있었거든요. 소위 '박남수'와 어울린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라고 불리며 해고되던 동료들과, 나중에 아들·딸이 기억할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만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박남수가 보관 중인 고소장 등 각종 법률기록물./자료제공=국립민속박물관
▲ 박남수가 보관 중인 고소장 등 각종 법률기록물.
/자료제공=국립민속박물관


박 선생은 알고 지내던 김근태 전 국회의원을 통해 법적투쟁을 시작했다.


이른바 '법률 동냥'을 다니며 소장·준비서면을 준비했고 재판 진행 과정 등을 알음알음 배워갔다.

그는 2년 만에 변호사도 없이 대법원에서 '해고무효' 판결을 받았다.

이전까지 누구도 가능할 거라 생각조차 못 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회사에 돌아가는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임금을 받긴 했으나 그는 회사에서 일할 수 없었고, 1990년이 돼서야 회사로 복직하게 된다.

그동안 박 선생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변호사 사무실에서 노동법 상담을 시작하는 등 인천 노동운동의 길을 지속적으로 걸어왔다.

그가 해고된 지 30여년이 흐른 지금, 그는 계속 이어지는 산재사고의 원인을 '기록의 부재'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노동 역사가 기록되지 못하면서 똑같은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노동 현장을 기록하고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개개인의 경험들을 남겨야만 역사가 누적되면서 변화할 수 있거든요. 하루에 4~5명씩 죽어나가는 산재노동자가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인천에 노동박물관 같은 공간이 생겨야 합니다."

한편 이날 "시를 노래한다"고 스스로를 소개한 가수 이지상씨의 공연도 있었다.

그는 '노래마을' 등 1980년대부터 민중가요 노래패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날 그는 '그 쇳물은 쓰지마라', '노동의 새벽' 등의 노래를 불렀다.

/김은희 기자 haru@incheonilbo.com

 


 

▲ 박남수 코리아스파이서 전 노동자가 진행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 박남수 코리아스파이서 전 노동자가 진행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박남수는

 

1980년대 노동운동계 전설 … 지금도 활발히 시민운동



박남수는 1945년 4월24일 강원도 원주에서 3남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이후 형제들을 따라 수도권으로 이주하면서 1965년쯤 서울에서 공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서울 영등포, 경기 안양·군포 등에서 선반공 생활을 하다 1975년 인천 부평구에 위치한 코리아스파이서㈜에 입사했다.

1981년 노조 부위원장을 맡았으나 이듬해 임금 교섭 과정에서 불합리함을 고발하다 1982년 4월13일 회사에서 해고됐다.

이후 1984년 대법원 해고무효 확정 판결을 받았으나 정작 현장 복귀하는 데에는 6년이 더 걸렸다.

그는 1990년 10월11일에서야 다시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회사의 부당함을 입증하는 법적투쟁 과정을 밟으면서 노동운동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1985년부터 3년여간 노동법률사무소의 상담실장으로 일했으며 1988년에는 노동과건강연구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또 1995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갈산1동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두 차례 부평구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2002년 퇴직을 앞두고 '굴포천 살리기 운동 시민모임'에 뛰어들었으며 지금까지도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김은희 기자 haru@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