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작은 냄비에 두 개의 라면을 끓여야 했던 일을 열락[悅樂]이나 가는귀라 불러도 좋았을 때, 동짓날 아침 미안한 마음에 '난 귀신도 아닌데 팥죽이 싫더라' 하거나 '라면국물의 간이 비슷하게 맞는다는 것은 서로 핏속의 염분이 비슷하다는 뜻이야'라는 말이나 해야 했을 때, 혹은 당신이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아 있나봐'하고 말해올 때,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아 있어서 출출하고 춥고 더럽다가 금세 더부룩해질 때, 밥상을 밀어두고 그대로 누워 당신에게 이것저것 물을 것도 많았을 때, 그러다 배가 아프고 손이 저리고 얼굴이 창백해질 때, 어린 당신이 서랍에서 바늘을 꺼낼 때, 등을 누르고 팔을 쓰다듬고 귓불을 꼬집을 때, 맥을 잘못 짚어올 때, '맥박이 흐린데? 심하게 체한 것 같아' 바늘 끝으로 머리를 긁는 당신의 모습이 낯설지 않을 때, 열 개의 손가락을 다 땄을 때, 그 피가 아까워 백성 민(民)자나 뱀 사(蛇)를 거꾸로 적어볼 때, 당신을 종로로 내보내고 누웠던 자리에 그대로 누웠을 때, 손으로 손을 주무를 때, 눈을 꼭 감을 때, 눈을 꼭 감아서 나는 꿈도 보일 때, 새봄이 온 그 곳 들판에도 당신의 긴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을 때)

▶ 이 시는 동짓날의 기억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은 냄비에 라면 두 개를 끓여야 했던 일이며, 팥죽이 없는 동짓날의 서운함을 그저 팥죽이 싫다는 말로 묻고, 또 그 라면에 체한 '나'의 등을 두드리며 손을 따주던 '당신'. 그러나 어려운 나날 속에서 '당신'과의 기억은 시인에게 '꿈' 그 자체이다. 일을 나간 '당신'의 긴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을 때 시인은 '당신'의 존재를 느끼고 '꿈'을 본다. 차가운 겨울의 정점이라는 '동지'에 시인은 삶의 진정한 '동지'인 '당신'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권경아 문학평론가

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