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동창들의 모임에 나가보면 더러 중복해서 참석하는 고우를 볼수 있다. 예를 들어 1회 졸업 모임에도 가고 3회 동기 모임에도 나가는 모양새이다. 사정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기겠으나 그럴만한 사유가 있다. 그것은 원래 1회에 해당할 학년이었으나 6.25전쟁으로 참전했다가 뒤늦게 복귀 2년후의 학년에 복학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많아서 선배모임에 가라거나 후배들에게나 가라고 가벼운 농들을 하지만 그들은 6.25의 학도병 출신들이다.

 전쟁이 발발 미처 전열을 가다듬지 못했던 초기 많은 학생들이 자진하여 참전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교실에만 머물러 있을수만 없다는 갸륵한 뜻에서였다.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학생복 차림으로 였다. 학도병들의 포항방어전투 활약은 길이 빛날 전공이다. 그러나 학도의용군의 대개는 9ㆍ15 인천상륙 이후의 지원 입대자들이다. 백설이 분분하던 그해 12월18일 축현초등학교에 모인 인천의 3천여 학생들이 학도의용군을 조직 그 길로 남하 입대 참전했다. 그중에는 중공군이 대거 투입된 가평전투등에서 많은 희생을 내기도 했다. 한 동리에서 4명이 참가 겨우 1명이 상이용사로 정전후 귀환하기도 했다.

 의용군이라면 전란이 있을때 나라를 구하자는 뜻이 있는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조직한 군대이다. 그들은 변변한 무기도 없이 훈련을 제대로 받은바 없으나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며 용전했다. 외침이 많았던 우리 역사에 그같은 의용군의 활약은 컸다. 임진란때의 승군을 비롯한 민병들이 그렇고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각지의 의병들이 그렇다.

 인천의 학도의용대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이 48년전 고향을 떠나던 날인 18일 창립총회를 갖고 참전 50주년을 맞는 2000년까지 역사편찬과 기념비등을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지금 흘러간 세월 만큼이나 전쟁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딱한 사실은 그들의 출신학교에는 제대로 된 기록이나 기념비 하나 세워진 일이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