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에 오르고 내리고 … '삶의 애환' 싣고 달렸다

 

송도의 역사는 우리나라 유일 협궤철도였던 수인선(水仁線)의 역사와 깊게 맞물려 있다.
수인선 노선에 따라 사람들의 삶과 지역의 공간도 큰 변화를 보였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활발할 때는 수인선 종점에 시장이 형성돼 옥련동, 즉 옛 송도 사람들의 생활반경이 되어 주기도 했다.
열차요금이 다른 도로교통에 비해 저렴했기 때문에 수인선은 수원과 인천 사이 서민들의 생업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됐다.
인천도시역사관과 인천일보는 2회에 걸쳐 수인선을 타고 다니던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 당시 생생한 증언을 들어봤다.
특별히 김희주 인천역사교육연구소 소장이 조사에 참여했다.

 

▲ 옛 송도역 모습. 2012 인천광역시립박물관 기획특별전 '수인선, 두 번째 안녕'에서 전재.
▲ 옛 송도역 모습. 2012 인천광역시립박물관 기획특별전 '수인선, 두 번째 안녕'에서 전재.
▲ 1960년대 송도역 플랫폼 사진.
▲ 1957년 소래철교 증기기관차

 

▲ 수인선 송도역 표지판
▲ 수인선 송도역 표지판

우리나라 유일 협궤철도 수인선 서민의 발 … 송도 역사와 맞물려

 

숨어서 매달려서 몰래 탄 학생들

첫차타는 생선가게 상인·회사원

근교농업 재배작물 파는 사람들

막차 안 놓치려 매번 뛰는 친구들
 


# 첫 차 타는 사람들



1973년 남인천~송도 구간이 폐선 되면서 송도역은 수인선의 새로운 종점이 됐다.

남인천역에 있던 회차시설인 전차대도 이곳으로 옮겨졌다. 남인천을 향하던 승객과 화물이 송도역으로 몰렸다. 수원을 출발한 첫 차는 송도에 아침 7시30분이면 도착했다. 송도역에서 첫차를 타는 승객은 학생이거나 회사원, 생선 파는 상인들이었다.

수원과 인천을 제외하고 중간지역에는 진학할 상급학교가 없다보니 남동, 소래, 군자, 안산 원곡동 등에 사는 학생들이 통학 수단으로 이용했다.

"1979년 원곡동에서 첫차타고 송도역에 내리면 11번 버스를 탔어요. 내가 인천여상 다녔거든."(익명·인천여상 학생)

학생들은 수인선을 '빵차'라고 했다. 철도 모양이 옛날 학교 급식으로 자주 나왔던 식빵과 모양이 비슷했다고 한다. "빵차 타고 학교 다니다 보면 교복 셔츠 하얀 옷깃이랑 하얀 신발이 기차 안에서 다 망가져버려요 사람들이 워낙 많았으니까. 학생들 중에는 몰래 숨어서 공짜로 타고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지. 옛날엔 기차가 그렇게 빠르지 않았으니 애들이 매달려 타기도 하고 뛰어내리기도 했어요."(익명·학생)

수원과 인천 사이 지역에도 상급학교가 생겨나고 반면 학령인구는 줄어들면서 학생 정기여객의 수는 급속히 감소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연간 2000명 정도로 집계되던 학생 탑승객 수는 1980년대 들어서며 하루 10인 미만으로 거의 사라진다.

인천 동양화학 주변 공장지대로 출퇴근하는 이들도 수인선을 이용했다. "첫차가 오면 우르르 사람들이 내려오고 우리 가게에 와서 버스표를 제일 많이 사가고 그랬죠. 그때는 회수권이었고 나중에 토큰으로 바뀌었어요."(익명·당시 매점운영)

수산시장에서 물건을 떼야 하는 생선가게 상인들도 수인선 첫차를 탔다. 생선장사들은 시장까지 들어가지 않고 송도역 계단에 앉아 바로 물건을 팔았다. 싱싱한 생선과 갯벌 생물을 사러 동네 주민들 뿐 아니라 인천 다른 지역에서도 왔다.

 


# 낮차 타는 사람들

 

▲ 수인선 행선지 표지판.<br>
▲ 수인선 행선지 표지판.

낮에도 수인선은 붐볐다.

수원에서 오전 11시 떠나 송도에 낮 12시 반에 도착하는 차는 주로 근교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탔다. 직접 재배한 채소나 곡물을 내다 팔았다. 현지에서 물건을 떼다가 파는 중간상인들도 있었다.

다음 기차가 송도역에서 오후 6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송도역전 마당에는 '반짝시장'이 열렸다.

"수원에서 빈 차로 떠났다가 점점 승객이 늘어요. 소래역 앞에도 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내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송도역에서 내렸지요."(유판길·1951년생·수인선 기관사)

"다들 뭘 사러오거나 팔러 오거나 그랬죠. 쌀 사려면 역전쌀집으로 가면 됐었어요." (차송자·1954년생)
"다들 고무 '다라이' 하나 머리에 이고 자루는 손에 들고 차에 탔어. 고추, 무, 잡곡, 과일, 조개 이런 게 들려있었어요. 애들이 가져온 것은 함부로 사거나 팔면 안됐어요. 훔친 것일 수도 있어서 우리 어머니가 몇 번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지요." (임동환·1956년생·역전쌀집)

"친정이 참외 농사를 지었는데 수인선을 타고 인천까지 몇 백 개씩 싣고 와요. 화물칸이 필요할 때는 별도의 비용을 더 지불했어요. 송도역에서 내린 다음 여럿이 택시를 타거나 화물차를 불러서 '깡시장'(동인천-배다리쪽 인현통닭 뒤)에 가서 팔았어요. 깡시장에서는 경매로 넘겼어요. 공설운동장 도원역 가기 전 굴다리에서도 깡시장이 열렸어요. 거기서도 야채며 과일이며 팔았지."(문희숙·1958년생)

"기차가 들어오면 그 앞이 마당이었는데 복숭아철이 되면 발 디딜 자리도 없었어."(신영자·1937년생)

"현대시장, 용현시장 같은 시장 상인들도 많이 왔고 그 자리에서 사가지고 가서 팔았어요."(이정호·1964년생·송도방앗간)

반대로 송도역에서 낮차를 타고 물건을 팔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연안부두에서 생선을 사서 군자나 월곶, 야목(경기도 화성시)까지 가서 팔았어요. 생선 판 대가를 돈 대신 쌀이나 잡곡으로 받아와 우리 어머니에게 넘기면 어머니가 돈으로 바꿔 줬죠."(임동환·1956년생·역전쌀집)



# 막차 타는 사람들

막차에는 학교를 파하고 기차시간을 기다린 학생들과 장사를 마친 반짝시장의 상인들, 회사원까지 서로 다른 시간에 왔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이용해 늘 만원이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막차 시간에 늦어서 친구들과 매번 뛰었던 기억이 나요. 매일 막차만 타다 보니까 익숙한 얼굴들도 많았지요."(문희숙·1958년생)

막차를 놓치면 큰일이기 때문에 서둘러 달려오는 사람이 있으면 역무원은 빨리 오라고 소리치고 기차는 기다려주기도 했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