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파리에서 언론사 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가깝게 지내던 프랑스 언론인 데캉 씨가 스포츠 주간잡지를 창업할 계획이라면서 은행 전문가들 앞에서 창간 계획을 설명하는 장소에 같이 가자고 청했다. 은행에 가서 주간잡지 창업계획을 설명한다는 것이 흥미롭기도 해서 자리를 함께했다.

▶프랑스 3대 은행으로 꼽히는 크레디 리요네 본사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꼽히는 리용에서 창업한 유서 깊은 은행답게 19세기 석조건물의 내부도 화려하고 우아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아담한 회의실에서 진행된 창업 설명모임에는 은행 측과 창업자 쪽에서 도합 10여명의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준비해 간 창업준비자료를 중심으로 설명이 끝나자 은행 측의 세부적이며 전문적인 몇 가지 질문이 있었다.

▶크레디 리요네에서의 창업설명 모임이 있은 후 데캉 씨로부터 점심을 함께하자는 연락이 왔다. 필히 좋은 소식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은행에서는 융자해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면서 창업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다고 담담히 말하고 있었다. 은행에서는 현재 스포츠 일간신문은 물론 일요신문들이 앞다투어 주간 부록을 발행하는 상황에서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프랑스도 금융산업의 선진국으로 꼽히지만 영국,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같은 유럽의 대표적인 금융산업 선진국가에서는 은행이 창업 계획을 전문가적으로 분석하고 긍정적일 때는 전폭적인 자금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크레디 리요네 같은 은행에도 출판, 언론 전문가들뿐 아니라 산업 전반에 걸친 경제전문가들이 기백명이나 포진해 있다. 기업인들은 물론 창업을 계획하는 사람들도 은행 전문가들의 판단을 존중한다. 금융기관이 자금 중계 역할뿐 아니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창업과 투자 교통정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현대 그룹의 창업자 아산(峨山) 정주영 회장은 소탈하면서도 경험에서 비롯된 많은 명언을 남겼지만 "우리나라 은행은 담보잡고 돈 빌려주는 전당포 같다"는 말은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주요 은행장들에게 "금융산업이 디지털 인재와 인공지능(AI) 인프라 확충이 시급하다"고 전제하면서 "자금중계의 효율성을 높이고 성장 잠재력이 큰 기업에게 자금지원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 달라"고 당부했다. 그동안 몸집은 커졌지만 각 분야의 우수한 전문인력을 확보하지 못한 은행들에게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일 것 같아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