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란 경기 동두천시 여성가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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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청백리이자 최장수 재상으로 유명한 황희 정승 일화가 있다. 황희 정승 집안의 하인 부부 중 아내가 찾아와 "시아버지 제삿날인데, 개가 새끼를 낳았으니 제사를 드리지 말아야겠죠?" 하니, 황희 정승은 제사를 안 지내도 된다고 했다. 그런데 잠시 후 남편 하인이 찾아와 "아버지 제삿날에 개가 새끼를 낳았지만, 그래도 제사는 드려야겠지요?" 하고 묻자, "그렇지, 제사는 드려야지"라고 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부인이 "대감은 어찌 같은 일에 이래도 옳다, 저래도 옳다 하십니까?"라고 하자, "부인 말도 옳소"라고 했다는 이야기인데, 이와 비슷한 일화로, 집안의 하인들이 다툼으로 시비를 가리는 이야기도 있다.

젊은 시절, 이 일화를 들었을 때는 황희 정승이 우유부단하다고 느꼈다. 일관성 없고, 소신 없는 사람들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보니 황희 정승의 이 이야기도 달리 해석된다. 내 사고의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공감해서 대응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가 "엄마가 너희들보다 더 오래 살았거든, 더 경험이 많거든. 그러니 엄마 말 들어" 이런 식으로 아이들의 생각을 제쳐두고, 내 경험과 정보의 테두리 안에 아이들을 맞추려고 한 적이 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확증편향'이라고 한다. 내가 아는 지식이 진리인양,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심리다. 새로운 정보보다는 자신이 확신하는 정보가 옳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직장에서도 많이 발생한다. 내가 공직에 발을 들여 놓은 1990년대 초반에는 술 잘 마시고, 놀 줄 아는 직원이 일 잘한다고 생각하는 상사가 많았다. 직장에 처음 입사해서 회식자리를 갔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술이 돌고 있었다. 신입사원인 내게 당연하게 과장의 술병이 왔고, 나는 술을 못 마신다고 손사래를 하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지금 그 과장은 퇴직했지만 술을 못 마시니 일도 잘못하겠다는 불편한 말을 하고, 옆에서는 못 마셔도 술잔을 받아만 놓으라며 충고했다. 다음 회식에서는 자리를 중앙이 아닌 가장자리 한편에 앉으라는 불편한 말도 들었다.

그런 직장 분위기의 편견을 깨고자 술은 못 마셔도 일은 정말 똑소리나게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어느 부서를 가든 열심히 일했다.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이런 구시대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상사는 없겠지만, 1990년대 초반 공직사회는 술 잘 마시는 사람이 일 잘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이런 편견적인 성향은 학자들 말에 의하면 고위직일수록, 학식이 높은 사람일수록, 그리고 성공의 경험이 많을수록 심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절대 자신의 생각이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동조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자신의 신념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이러한 현상이 최근 사회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나 또한 내가 정해놓은 틀에서 '옳다, 그르다'를 정하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틀릴 수 있고, 실수할 수 있다. 내 사고의 틀과 다르다고 "내가 더 많은 경험을 했고, 학식이 있다"가 아니라 '열린 사고'를 갖고 확증편향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황희 정승의 '네 말이 옳다'를 다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