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호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클 샌델은 자기 저서가 유독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정의를 손상하는 것을 살상이나 강탈 만큼 질 나쁜 범죄로 생각하는 우리 국민들의 두뇌 속에는 '정의 중추(正義 中樞)'가 존재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딱딱한 정치 철학자의 저서가 국민 필독서 반열에 올랐는지 모른다. 지금도 국민들의 머리속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정의의 문제다. 그 단초를 제공한 입학 공정성 시비는 사회에 일파만파를 던져 아이들 교육의 미래는 오리무중에 빠졌고,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 실현의 약속은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평등은 인류가 수호해야 할 이념이다. 그런데 완벽하게 평등한 사회가 역사에 존재한 적 있었던가. 현실에 만연하는 불평등을 납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기회 균등'의 신화다. 우리는 기회가 똑같이 개방되었다면 결과의 불평등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배웠다. 기회의 개방 만으로 정의는 보장되는 것일까? '스카이 캐슬'을 보라. 야심 찬 부모들은 재력과 인맥으로 자녀의 삶을 디자인한다. 가까운 미래에 그들의 후계자들은 유전자까지 디자인하려 들 것이다. 그들은 자유 경쟁주의자를 자처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평등이 간절한 정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유가 중요한 정의다.

우리가 게임의 결과에 승복할 때는 그것이 공정한 절차와 룰에 의해 치러졌을 때다. 어떤 사람의 유전자에는 더 빨리 뛸 능력이 새겨져 있지만, 우리는 그들과 같은 조건의 시합을 받아들인다. 다른 선택이 없는 데다, 노력으로 역전할 지 모른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페어플레이의 약속을 지킨다면 타고난 자들이 먼저 결승점에 도달해도 우리는 불평하지 않는다. 최초의 불평등을 참고 결과에 승복하는 것은 절차와 형식의 공정성으로 최소의 정의는 지켜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룰을 어기고 10m 앞에서 먼저 출발하거나 중간에 새치기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유일한 것을 걷어차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긴 자가 아니라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는 자에게 분노한다.

불평등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다. 과학의 발전으로 유전자 편집까지 가능한 시대에 기회의 평등은 더욱 더 무지개 너머로 사라지고 있다. 피할 수 없는 불평등에 대한 해법을 이미 50년 전 존 롤스는 '차등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불평등한 결과가 오더라도 사회적 약자에게 이익이 된다면, 더 나가 그 불평등을 없애면, 오히려 약자의 이익이 감소한다면, 그 불평등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론이다. 승자가 약자에게 수확물을 나누고 타고난 이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해 살 때 정의는 최소한의 모습은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모두 용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으니 개천의 가재, 개구리, 붕어로 하늘의 구름 쳐다보며 출혈 경쟁하지 말고 따뜻한 개천 만드는데 힘을 쏟자'라는 요지의 한 법대 교수의 글이 세상에 회자됐다. 우위를 선점한 자가 붕어가 올라올 사다리를 걷어차고 불평등 해소 책임을 가재에게 떠넘겨도 된다는 뜻이 아니길 바란다. 하늘과 개천이 구분되어서도 안 되지만, 구분을 피하기 어렵다면 용이 내려와 따뜻한 개천을 만들어야 하며, 개천의 동물들이 오르내릴 수 있는 사다리가 곳곳에 있어야 한다.

미국 노동 전문가 조언 윌리엄스는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그저 태어나면서 3루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는 타석에 들어가지 않고도 3루에 선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1루에 진출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학자가 볼 때 삶의 모든 것은 쟁취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얻은 데 불과하다. 건강과 수명이 그러한 것 같이 재능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3루에 선 사람은 삶에 내재된 불평등성을 이해하고 자신은 그저 우연의 수혜자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사회에 무엇을 되돌려줄 지 고민하고 핸디캡을 달갑게 받아들여야 한다. 노력하는 자가 자기 힘으로 3루에 진출하는 것을 가로 막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는 자는 게임에서 나가야 한다.

송준호 교수는 내과전문의로 미국 미시간대 펠로우 교수, 인하대병원 공공의료사업단장을 지냈다. 인하대병원 대외홍보정책실장이며, 인천시의사협회 학술이사다. 전문 분야는 신장학, 혈액투석, 당뇨병성신증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