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이 되려던 진시황 염원, 한반도까지 닿았다

 

▲ 신선사상을 표현한 걸작품 '백제금동대향로'

 

▲ 제천의례를 중시했던 고조선시대 청동무구 '다뉴세문경(숭실대박물관)'

 

▲ 제천의례를 중시했던 고조선시대 청동무구 '팔주령(국립광주박물관)'

 

중국통일한 최고 권력자
신선처럼 불로불사 원해

주술신앙 전문가 서불은
3000명 동남동녀와 함께
배 타고 '불로초' 탐사 떠나

300년간 뜨거웠던 이 이야기는
황해 통한 고대사상 교류 증거로

인간은 고대부터 신을 믿었다.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들은 신에게 의지했다. 신은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의 부르심과 힘으로 권력을 잡은 인간은 다시 신을 앞세워 거대한 제국을 완성했다. 최고의 권력자인 황제가 된 인간은 이제 신이 되고 싶었다. 신은 영원무궁하다. 인간이 신이 되는 첫 번째는 '죽지 않는 것(不死)'이다. 늙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의 간절한 숙원이었다.

기원전 4세기, 중국 대륙은 전국시대로 일컫는 아비규환의 무법천지였다. 전쟁은 쉼 없고 영토의 주인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삶도 지옥이고 죽음도 식상했다. 이러한 시기에 발해 연안을 포함한 연(燕)과 제(齊)나라에서 신기루처럼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번졌다. '발해 바다 속에 있는 봉래산에 신선의 집이 있다. 신선들은 아침저녁으로 하늘을 오르내리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 장생불사의 약을 먹는다. 새와 짐승은 모두 희고 바라보면 구름처럼 보인다. 신선의 집은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졌다.'

고대 중원의 전쟁터에서 일어난 동방에 대한 동경은 당시 동방이 훨씬 선진적인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당대에 불교가 번성하자 도처에서 구법승들이 천축(天竺)을 가기 위해 죽음을 마다않고 인도로 가는 멀고 먼 여정에 뛰어든 것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2500여년 전, 그들도 신선이 산다는 동방의 삼신산을 찾아가고 싶었다. 속세를 벗어나 신선처럼 살고 싶은 방선도(方僊道)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던 것이다.

선(僊)의 의미는 '오래 살며 신선이 되어가는 것'인데 이는 결국 춤추고 소매를 펄럭이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즉, 신선은 지상과 천상을 자유자재로 왕래하는 권능을 지닌 자를 의미한다. 불교의 비천상도 이 같은 의미다. 샤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춤과 노래로 신을 즐겁게 한다. 샤먼은 춤을 추며 천상과 지상을 오간다. 이때 하늘을 왕래하는 산이 우주의 중심 되는 산이고 이것이 곧 '삼신산'인 것이다.

방사는 고대의 과학과 주술신앙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천문과 역법에 능통했고 음양오행의 술수에 밝았으며 신선과 양생을 주장했다. 또한, 접신(接神)을 통해 죽은 자의 영혼과 교섭하는 일에도 정통한 신비주의자였다. 이들이 주장하는 장생불사는 샤먼의 치유능력과도 통한다. 이처럼 신선사상은 샤먼(巫)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또한, 모든 약초를 관장하는 신인 신농씨와도 연결된다. 신농씨는 약초의 신이자 동이족의 조상이다.

신선사상이 널리 퍼져 있는 곳은 산동반도 일대와 발해 연안 지역이다. 이 지역은 동이족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곳이다. 동이의 나라 고조선은 제천의례를 중시했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과 팔주령(八珠鈴)은 고조선 청동무구(靑銅巫具)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동이족들을 모두 분산시켜 동이족의 흔적을 지우고 진나라의 백성으로 흡수해버렸다. 이때, 샤머니즘이 뿌리인 신선사상도 서서히 퇴색하기 시작했다.

전국시대는 백가쟁명이 말해주듯 인문주의 정신이 사상계를 지배한 시기였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신비한 기운을 믿지 않았다. 세상이 모든 문제는 인간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중심사상이었다. 신이 중심이던 세상에서 인간이 중심인 세상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때, 방사들의 신비로운 신선과 양생술은 대부분 배척당했다. 보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이 관심사였다. 그중에서도 중심은 유가(儒家)였다.

하지만 중원을 통일하고 최고의 권력자가 된 진시황은 신선이 되고 싶었다. 통일제국을 순회하고 산둥성 낭야에 이르러 자신의 통일 위업을 천지에 알렸다. 그리고 발해 한 가운데 삼신산에 있다는 불로초를 찾기로 했다. 제나라의 방사 서불이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3000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와 함께 배를 타고 불로초를 찾아 떠났다.

등저우(登州)에서 출발한 서불의 불로초 탐사 선단이 향한 항로는 어디였을까. 당시의 항해술을 고려할 때 발해만 연안을 따라 한반도의 서해안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높다. 그곳이 어디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설화가 되어 '서불이 지나간 곳(徐市過次)'이라며 한반도 곳곳에 흔적이 남아있다. 이는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서불의 최종 도착지가 일본이라는 주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한반도는 일본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런가.

진시황 때 절정기를 맞이한 신선사상은 한무제 때에도 그 열망이 식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무제도 신선이 되기 위해 동방으로 향했다. 그 결과 고조선을 정벌하고 한사군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한사군 설치 이후부터 삼신산 불로초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고조선까지 영토를 넓힌 한나라는 보다 많은 지리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를 넘어 차지한 동방은 오매불망 그려왔던 것처럼 신비하지 않았다. 상상속의 지리가 현실적인 지리로 편입되는 순간, 이상향으로서의 동방에 대한 환상도 급속하게 소멸되었다. 동방의 이상향이 일본이었다면 열망은 더욱 타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300년 동안 뜨거웠던 삼신산 불로초 이야기는 황해를 통한 고대 문화와 사상의 교류를 알려주는 뚜렷한 증거인 것이다. 즉, 우수한 동방 문화를 열망하고 이를 추구하고자 했던 중원 민족의 '구선로(求仙路)'였던 것이다. 이 길을 통해 신선사상과 기술 등 인적·물적 자원들이 오가며 정치, 문화, 사상, 종교 등에 많은 발달을 가져왔을 것이다. 신선사상은 도교로 정착되었다. 오늘날 도교는 중국이 발상지인 전통사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그 뿌리는 동방에 있었고 그 중심은 바로 고조선이었기 때문이다.





[불로초 전설 도착지 중 한곳은 '인천 덕적도 국수봉']

진시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불로초를 찾아 동방으로 향한 서불이 도착한 곳은 어디였을까. 발해 연안의 해상항로를 따라가면 그 정착지는 한반도 서해안일 가능성이 높다. 3000명이 넘는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항해를 하려면 식량과 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식수를 얻으려면 한반도 정박은 필수적인 것이다.

서불이 도착한 곳이라는 전설은 한반도 곳곳에 전해온다. 인천의 덕적도 국수봉도 그중의 한 곳이다. 『인천부사』에 따르면 '덕적도 북단 국수봉은 진시황제가 불로불사의 영약을 구하기 위해 서불로 하여금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을 보내어 영약(靈藥) 국로(菊露)를 발견한 곳이라는 전설'이 남아 있다.

서불이 도착했다고 전해오는 곳은 군산 선유도, 고흥반도 서남단, 거제, 통영, 남해, 부산, 제주 서귀포 등에 이르기까지 연안을 따라 산재한다. 이는 해상항로의 발달과 함께 일본에까지 전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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