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국립생물자원관 연구관
▲ 노간주나무. /사진제공=국립생물자원관

 

▲박찬호 국립생물자원관 연구관
▲박찬호 국립생물자원관 연구관

산과 들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절정이다. 아직은 낮의 따스함이 남아서 길에서 만나는 산국, 감국 들이 반가운데 벌써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이다.

이제 곧 아침저녁으로 춥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되면 한껏 자태를 뽐내던 단풍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들만 남게 된다. 그래도 이러한 쓸쓸한 야산을 보면 사이사이로 소나무와 비슷한 초록색 바늘잎을 한 나무가 눈에 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빈약한 소나무처럼 보이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작고 뾰족한 바늘잎이 무성한 것이 향나무 같기도 하다. 이들은 바로 노간주나무(Juniperus rigida)로 인천지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산의 양지바른 곳이면 쉽게 만나는 나무이다.

멋없이 키만 삐쭉하게 큰 것이 척박하고 퍽퍽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서 있다. 자기와 친척뻘인 향나무나 주목 등과는 다르게 성장 속도도 느리고 줄기의 굵기도 빈약해 보이지만 강한 바람이 불어도 꺾이지 않고 우직하게 버티는 모습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가시같은 잎은 바늘처럼 뾰족하고 마디마다 가지와 직각으로 3개씩 돌려나는데 만져 보면 마구 찔리는 것이 가까이하기 힘든 성격 같다. 주목, 은행처럼 암수가 다른 나무이고, 암나무에는 5월쯤 꽃이 피어 열매는 그 다음해 가을 무렵에 검붉게 익는다. 요즘 작은 포도송이 같은 열매들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직은 덜 영근 초록색부터 잘 익은 검붉은 자주색까지 만날 수 있다. 굵기가 콩알만한 열매는 향기가 좋은 술 종류인 진(gin)의 원료이다. 서양 노간주나무의 열매는 우리의 것보다 크고 기름도 많이 나와 서양에선 희랍시대부터 약이나 향료로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도 노간주 열매로 술을 담가 두송주(杜松酒)라고 하여 많이 즐겼다. 그 외에도 열매를 달여 먹기도 하고, 두송유(杜松油)라 하여 기름을 짜서 약으로 쓰기도 했다. 이 기름은 전통적으로 관절염, 근육통, 신경통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왔다. 노간주나무는 노가자(老柯子), 노송(老松), 두송(杜松) 등 여러 이름이 있어서 예로부터 쓰임이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키는 5∼6m까지 자란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산에서 만나는 노간주나무들은 대부분 2~3m 정도이고, 줄기 둘레도 어른손 한 뼘 정도이다.

하지만 줄기가 곧게 자라며 가지도 모조리 위를 향하면서 사이좋게 다닥다닥 붙어 있어 몸매가 날씬하다. 굵지는 않지만 유연한 성질 덕에 나무를 불에 살살 구우면 잘 구부려지고 질겨져서 오래전부터 쇠코뚜레로 많이 사용했다.

또한 흑갈색으로 갈라지는 나무껍질은 삶아서 천을 염색하는 데 쓰기도 했다. 정월 대보름에는 그해의 풍년 농사를 예축(豫祝)하기 위하여 노간주나무로 불을 때는 풍속도 있었다.

이렇듯 예로부터 쓰임새가 많았고 선조들에게 친숙한 노간주나무는 아직은 산에서 드문드문 보이지만, 강한 바람에도 극성스러운 가뭄과 갑자기 찾아오는 한파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성질 때문인지 다른 침엽수들에 비해 개체수가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급하게만 성장하는 것보다는 노간주나무처럼 때로는 유연하고 천천히 가는 것이 더 긴 시간을 살아가는 지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늦가을 하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