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삼아서 가끔 오르는 동네 앞산
이걸 등산인 양 등산복을 차려 입고
등산객처럼 앞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목재소를 지나노라면 어김없이 컹컹
무턱대고 짖어대는 개소리를 듣는다.

내가 어쨌다고
내가 어떻다고

내가 모르는 나의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길 없는 그놈의
무턱대고 짖어대는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문득 나를 찢어댄다
나의 무엇이
그놈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지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나를 오르기 시작한다.
앞산은 사라지고 내 앞에
우뚝 다가서는 가파른 나
어디쯤 오르고 있는지
묻고 싶다 무진장 컹컹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 뜻하지 않은 순간에 낯선 나를 발견하곤 한다. 현실 세계에 틈과 균열을 일으키며 갑자기 다가오는 실재(The Real)의 순간은 우리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소크라테스가 델포이 신전에서 받았던 신탁에 대한 답 역시 '너 자신을 알라'였고, 코린토스의 왕자로 행복하게 살던 오이디푸스가 갑자기 받았던 신탁의 결과도 결국은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였다. 이 시의 화자 역시 이런 문제를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맞닥뜨린다. 나지막한 동네 앞산을 올라가면서 등산인 양 등산복을 차려입은 모습을 보고 목재소 앞 개가 '컹컹' 짖어댄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을까. "내가 모르는 나의 무엇을 보고 있는지/나로서는 도무지 알 길 없는"데 그놈은 무턱대고 날카롭게 짖어댄다. "내가 어쨌다고/내가 어떻다고" 저 개는 짖는 것일까. 화자로서는 당혹스럽다. 이때 생기는 날카로운 균열. 그 개는 '짖어대고' 시의 화자는 자신을 '찢어댄다'.
갑작스러운 순간에 맞이하는 삶과 존재의 진실이랄까. 이제 등산은 더 이상 동네 앞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다. 우뚝 솟아 있는 가파른 '나', 낯선 '나'와 조우한다. 그러니까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 물음의 과정이 등산의 과정이며 삶의 과정이다. 아주 사소한 순간에 벌어지는 일상의 현상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시인의 예민한 촉수와 그것을 자신의 삶과 존재에 투사하여 성찰하는 시인의 모습이 아름답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쯤 가고 있는가.

/강동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