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 실크로드를 가다] 한반도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 '경기만'(京畿灣) - 프롤로그-

[인천일보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해상 실크로드를 가다

 

 


고대 동서교역, 말·낙타 이용 육로로

조선·항해술 발전 '해상운송' 꽃 피워

명 정화, 아라비아·아프리카까지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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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둥성 웨이하이의 적산법화원 장보고 동상.

 


마젤란 세계일주로 '대항해시대' 개막

장보고와 후예들 '中 남방항로' 개발

고려 수도 개경 '아랍상인' 집단 거주

예성강 하구 벽란도 국제무역항으로


인천일보가 2006년부터 기획하고 추진해 온 '실크로드 대탐사'가 13년을 맞이했다.

그동안 실크로드 탐사팀은 중국과 중앙아시아, 중동과 코카서스, 발칸반도, 지중해 지역을 잇는 명실상부한 육상실크로드를 샅샅이 탐사했다.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10년이 넘게 이어진 탐사는 이제 자부심으로 자리 잡기 충분하다. 인천일보는 실크로드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창하여 왔다.

급변하는 세계화 시대에 한국의 미래는 실크로드 전략의 성공여부에 달려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천일보는 창간 30주년을 맞이하며 새롭게 해상실크로드 탐사를 시작한다.

바다는 인류의 탄생 이래로부터 두려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인류가 육지생활에서의 부단한 이동과 이에 따른 영역의 확산과정에서 부딪치는 필연이기도 하다. 인류는 육지에서 바다를 거쳐 섬들로 이동했고, 섬에서 바다를 건너 또 다른 육지로 이동했다. 인류는 모험과 정복, 정주와 이동을 되풀이하며 점차 바다를 이해하고 삶의 터전으로 가꿨다.

인류는 상호간의 교역과 교류를 통하여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고대의 동서교역은 대부분 육로를 통하여 이뤄졌다.

이는 초원과 사막을 건너는 험한 길이었고, 말과 낙타가 안성맞춤의 교통수단이었다.

중국이 서역에서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육로로의 교역은 점차 필요성이 감소됐다.
이와 함께 해상운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는 그동안 축적된 조선술과 항해술의 결과였다.

아울러, 해상교역이 육상보다 훨씬 많은 물량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는 이점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도자기나 원목 등 무겁고 깨지기 쉬운 것들은 배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본격적인 해상실크로드 시기가 된 것이다.

해상실크로드는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광범위하고 빠르게 발전했다. 중국과 한반도를 왕래하는 항로는 물론, 6세기에 이미 중국의 정크선이 걸프해의 시라프 항구로 항해했다. 7세기에는 아랍의 교역선도 중국의 광저우(廣州)에 입항했다. 아랍의 교역선은 인도 말라바르 해안의 케랄라와 스리랑카, 말라카와 수마트라 해안, 베트남 남부의 참파를 거쳐 중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북상하여 한반도까지 진출했다.

이 같은 사실은 경주 고분에서 출토된 로마·페르시아계통의 유리 제품, 사산조 페르시아 문양의 예술품 등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고대 페르시아 대서사시 '쿠쉬나메'에는 7세기 중엽 신라에
대한 내용과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공주의 결혼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교류는 육로보다는 해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혜초 스님의 인도순례도 중국 광저우에서 동남아 바닷길을 이용한 것이었다.

15세기 초, 명나라 제독 정화는 120m가 넘는 대형 선박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28년간 7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반도 및 아프리카 동부지역까지 이르는 대항해를 했다.

유럽은 15세기 말에 이르러 새로운 항로 찾기에 나섰다.

엔리케의 아프리카 서해안 항로 개척,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등이 이루어졌다.

16세기 초에는 마젤란이 세계 일주를 완성하여 바야흐로 '대항해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해상 실크로드는 인류에게 놀랄 만한 과학적 성취와 물류혁명을 가져다주었다. '향료', '도자기', '백은' 등의 별칭이 붙은 길이 생겨나기도 했다.

아울러 불교, 의술, 벼농사 등 인류문명도 광범위하게 이동했다. 해상실크로드는 지구를 하나의 문명으로 '일체화'하는 통로로 발전한 것이다.

그리하여 제해권(制海權)을 차지한 국가가 세계의 강국이 된다는 공식을 일반화했다.

고대의 해상 실크로드는 한반도와도 관련이 깊다.

한국과 중국은 지정학적으로도 황해(黃海)를 중심으로 마주보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일찍부터 산동과 요동반도의 연해안을 따라 바닷길이 열렸다.

그 중심에는 항상 경기만(京畿灣)이 자리하고 있다.

경기와 인천 서쪽 한강의 하구를 중심으로 북쪽의 장산곶과 남쪽의 태안반도(泰安半島)와의 사이에 있는 반원형의 만이다.

이곳에는 고조선 유적인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과 삼국시대 사신들이 오갔던 인천 능허대, 신라의 대중교역 중심인 화성 당성, 고려의 국제무역항인 벽란도 등이 위치한다.

이는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항만인 인천항과 평택항으로 이어지고 있다.

황해를 오가는 바닷길은 무역로 뿐 아니라 침공로가 되기도 했다.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할 때, 소정방이 군사를 거느리고 황해를 횡단하여 덕물도에 도착했다.

이어 강화, 소래로 남하하여 당항성에 이른다. 고대 사료(史料)에 보이는 당성관련 자료와 발굴유물에 나타난 고고학적 연구결과들을 종합하면 경기만을 접하고 있는 화성에 당항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인들은 중국과의 빈번한 왕래 속에서 점차로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초기에는 연해안 항로를 이용하였지만, 장보고와 그 후예들은 황해를 횡단하거나 남중국해로 직접 내려가는 남방항로를 개발했다. 중국 저장성 닝보(寧波)와 타이저우(台州) 등지에는 신라인들의 활동사항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들이 있다.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는 아랍상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고,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창했다.

고려인들은 취안저우(泉州)와 항저우(杭州) 등 중국의 강남지역으로도 진출해 정치, 종교, 예술과 학문 등에 이르기까지 수준 높은 교류를 하며, 멀리 페르시아까지 교역을 확장했다.

또한, 고려인들은 독창적인 고려청자를 빚어내며 해상실크로드를 한반도까지 연결했다. 중국의 강남지역에서 만나는 고려청자와 관련 유적들은 고려의 위상과 고려인의 자긍심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유산들이다.

오늘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독자에게 우리의 고대 해상실크로드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바다를 잘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바다를 다스리는 민족이 세계적인 국가를 건설하였던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탐사팀은 이번 연재를 통하여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가 중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

▲ 인천일보 실크로드탐사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