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 인천서예협회 고문·시인
주 5일 근무가 시작된 지 꽤 오래 되었다. 주말은 꿀맛 같은 휴일이다. 관혼상제의 덫에 걸리면 그 꿀맛이 씀바귀나물 먹은 것 같이 얼굴 찡그리는 날도 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겐 황금의 휴식시간이다. 그럼에도 필자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일요일 저녁은 늘 식사 당번으로 빼앗기고 만다.
복면을 쓴 가수들이 2인 1조로 노래 대결을 벌이는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 때문에 아내는 '본방사수'를 하는 몇 안 되는 방송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마음 편히 쉴 수가 없다. '집사람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옛말이 있으니 참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얼굴, 몸 매무새 등을 숨긴 채 오로지 목소리 하나로 경합을 벌이는 프로그램에 처음엔 '뭐 저런 프로가 다 있어?'라고 궁시렁거리다 이젠 같이 빠져들다 못해 약간의 엄숙함과 처연함 까지도 느끼는 '광 팬'이 되었다.

일요일 저녁 시간 이 방송을 보고 있으면 '밥벌이의 신성함'을 느낄 수 있는 부수적 효과도 있다.
이 프로에 가면을 쓰고 출연하는 연예인의 유형을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아이돌 그룹 가운데 빼어난 가창력을 지닌 사람이거나, 아니면 개그맨(코미디언), 아니면 잊혀진 옛 가수들로 그때 그 시절을 회상시킬 수 있는 중견 가수들이다. 이 세 유형 속에서 시청자들에게 반가움과 쑥스러움을 안기는 경우는 대체로 세 번째 유형이다.

어쩌다 우리는 저렇게 심금을 울리며 감동을 준 가수를 잊고 있었나 하는 미안함마저 서린다. 가끔식 울먹이는 어조와 몸짓 모두가 무대에 오르고 싶은 그리움을 토로하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세월의 무상함이 원망스럽다.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몇이나 될까. 대중음악도 엄연한 엔터테이먼트 산업의 한 영역임은 어쩌지 못하는 결론이다.
소비자들이 찾지 않는 상품은 사라져 가듯 무대예술인 또는 프로그램 역시 자연스럽게 퇴출되며 소비자(시청자)들이 몰리면 공급이 늘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기획자 의도에 관객의 궁금증을 유발시키며 목소리와 몸짓만으로 유추하는 재미가 가미된 이 프로그램 또는 대중예술은 경제법칙에 의하여 설명될 수 없다.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는 감정과 직결된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작곡가, 작사가와 가수들이 저작권료를 받는 경제법칙에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한 잔 술에 흥이 절로 나 노래를 찾는 이유는 경제의 잣대로 설명되지 않기에 말이다.
너무 발효되어 무색무취한 흘러버린 노래, 바로 성인 취향의 대중음악을 '어덜트 컨뎀퍼러리(adult contemporary)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성인가요'라고 할 수 있다. 트로트에만 머무르지 않고 포크, 그룹사운드, 팝 발라드로 외연이 많이 넓어져 7080세대를 이제 이끼 낀 세대라고 할 수 없다.
가요방에서 흘러간 노래들을 열심히 부르고 있지만, 음반이나 공연 같은 음악 시장에서 중장년이 소비층으로 나왔다는 지표는 찾기 힘든 점이 아쉽다.
가요 시장의 순환구조가 끊기면 결국 가수(예능인)들은 혹시나 예능 프로그램에 고개를 기웃거리기 마련이다. 어쩌다 선택된 자들은 청취자들의 기억을 자극하고자 가면을 쓰고 노래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는 것 아닌가 한다.
잠시 잠깐 부르다 사라지는 작금의 노래들보다 오래 기억에 남을 노래를 불렀던 그 시절의 가수들이 무대 뒤에서 외로워 몸부림치며 울먹이는 모습. 그 풍경은 보지 않느니만 못하다.
가객의 힘은 어디서 올까. 귀가 아프도록 들어준 팬이 아닐까. "있을 때 잘 하지"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