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호 언론인
도자기에 관한 고진숙의 글을 읽었다. 작가는 도자기를 통해 역사를 읽는다. 도자기가 역사의 '바로미터'일 수 있다고 본다. 세상의 힘과 권력이 바뀌면 도자기도 바뀐다고 믿는다. 도자기는 권력의 상징, 시대의 거울인 셈이다. 그리 보는 작가의 안목이 흥미롭다. 특히 11세기 무렵 고려 황금기 때 최고급 청자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다. 당시 도자기는 세상을 손에 쥔 자들의 상징물이었다. 귀족들은 각자 품위에 어울리는 도자기가 필요했다. 덩달아 고려청자는 비췻빛 신비로움을 더해갔다.

작가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고려청자 명성은 드높았다. 12세기에는 돋보이는 정교하고 화려한 걸작들이 선보였는데, 도자 발전사의 으뜸가는 명품으로 꼽힌다. 특히 원조 격인 중국도자기를 제치고 '글로벌 우수 수출상품'이었다는 점은 각별하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 베트남과 필리핀 등지에서도 흔적이 발굴됐다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로운 시대는 잠시 뿐, 고려 말 상황에선 청자가 견디기 어려웠다. 청자토 풍부한 남해안은 왜구 침탈로 거덜을 냈다. 도공들은 빈 가마를 떠나 논밭으로 갔을 거다. 청자기술도 쇠퇴했고, 그 자리는 백자가 메웠다.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이 밝힌 '유약 기술과 높은 투명도, 상감무늬에 맞춘 균열 패턴 조절기술'마저 거의 끊겼다.

그나마 해강 유근형이라는 걸출한 도예가가 청자 비색을 겨우 살려냈지만, 그 유산마저 덧없게 됐다. '고려청자 정수'를 모은 국내 첫 도자박물관인 이천 해강도자미술관이 개인에게 팔렸기 때문이다. 덩달아 1천여 점의 도자유물들도 흩어질 지경이다. 해강 사후 아들 광렬씨가 홀로 지켜왔지만, 2억~3억원의 운영비는 버거웠을 테다. 결국 박물관 터는 부동산 매물로, 해강의 유물들은 돈벌이 상품으로 흩어지게 됐다. 이런 상황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 안타깝고 답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