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청년활동가 백지훤
▲ 서른네살 청년 '미생' 백지훤 청년활동가. 그는 하는 일마다 망했다. 모두 안된다고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해 봤더니, 역시 안됐다. 6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이제 새 길을 찾아 떠날 준비 중이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청년네트워크 워크숍.
'2015년 12월31일.' 그의 가슴팍에 깊이 새겨둔 날짜다. 그가 사회에 도전장을 내밀고 처음 시작한 카페 사업을 접고 폐업한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날 친구들과 함께 망한 것을 기념하는 '망파티'도 열었다.
사람들은 "참, 속도 좋다. 망했는데 무슨 파티냐"고 했지만, 그래도 '난 여기서 죽지는 않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실패라는 쓴맛부터 경험했지만, 인생역전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일까. 빚쟁이 청년은 좌절하지 않았다. 앞으로의 인생엔 오르막 길만 있으리라고 주문처럼 되뇌었을 것이다.

백지훤(34) 청년활동가. 그는 "올해부터 일체의 청년활동을 중단했다"면서 굳이 '전(前) 청년활동가'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백씨는 인천에서 대학시절을 보내면서 문화활동을 시작했다. 자생적인 청년문화 활동에 대한 그의 고민은 '문화자치연구소 거리울림'과 '공유공간 팩토리얼'이라는 문화단체를 만들어 냈다.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인천'을 만들기 위해서 청년 당사자로서, 문화활동을 하는 청년문화예술 활동가로 활동했다.

2018년 7월, 여전히 아직 제도권 진입을 못한 '미생'이다. 여느 청년들처럼 그는 미래가치가 기대되는 투자의 대상이건만, 사회안전망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긴 휴식 기간을 갖고 있는 서른네살 청년이다. 사회적 가치 창출과 자아 실현을 위한 몇번의 '실험'을 계속했지만 또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 같은 실패가 자신을 키워내는 큰 자산이 될 것으로 믿는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청년', '도시', '문화예술'이라는 세가지 분야를 중심으로 좌충우돌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뭘 해야할까, 누구나 겪는 성장통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경기도, 충남, 전북 등 전국을 돌아다녔다. 충남 계룡시에서 초·중·고등학교를 거쳐,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고 나서부터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평범한 군인 가족의 장남으로 큰 말썽 없이 자랐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진로를 놓고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 그는 음악 밴드부를 만들어 활동했다. 어느날 "음악을 업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부모님께서는 "왜 딴따라 되려고 하느냐, 먹고 살기 힘들다. 절대 안된다"면서 극구 반대했다.

음악하려는 아들을 반대한 여느 아버지처럼 합주실에 찾아와 기타를 부수고, 음악을 계속하면 너는 자식도 아니라고 할 만큼 부자지간의 관계가 악화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뒤늦게 현실과 타협했다. 음악을 직업으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대학진학 공부에 매진했다.

03학번이 정상이지만, 2년 늦은 05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간 그는 '내 세상'처럼 대학생활에 젖어들었다. 음악활동에 미련을 못버린 그는 공부보다는 음악에 더 열중했다. 친구들과 음악밴드, '더 라이즈'를 결성하고 음악을 취미로 계속해 나갔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그냥 재미 있게 살았습니다. 군대에 갔다 와서 3학년에 복학하고 나서 '뭐하면서 살지', '어떻게 하면, 좀 괜찮게 사는 거지'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한 거죠."

2012년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인하대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학부 때 만난 스승 때문이었다.

광고학같은 크리에이티브한 것이 꿈이었는데, 별로 재능이 없다고 느껴졌다. 어려서부터 책읽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저런 진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서규환 교수의 현대정치이론 수업을 들으면서 현대정치이론과 사상, 철학에 '훅' 빠져들었다.

어려운 강의여서 학생들이 기피하는 수업이었지만, 그에게는 매력적인 강의였다. 그리고 그 선생님에게 정치이론을 배우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다. 그는 "선생님 때문에 인천을 바로 볼 수 있었고, 도시와 같은 키워드를 공부했다"고 했다.

# 음악 하려다 '문화의 거리' 입성

일반대학원에서 1년 6개월을 마치고 논문을 써야 할 시기, 그는 논문을 안쓰고 문화예술 활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인하대 학생들과 '거리울림'이라는 문화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천은 왜 공연할 수 있는 곳이 없는걸까. 이 같은 의문은 당시 버스킹이 키워드였는데, 음악을 하면서 인천의 음악인프라가 부족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공연판에 대한 갈증, 그것을 길거리에서 풀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자치연구소 거리울림'은 사실 그 같은 척박한 현실을 스스로 타계하기 위한 방안으로 탄생했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대표로 활동했다. 그리고 어떤 장소에 '음악'이라는 문화예술의 옷을 입히면, 그 지역의 가치가 높아지지 않겠느냐라는 생각까지 결합됐다. 서른살까지 밴드를 계속했지만, 다른 사람의 공연판을 만들어 주면서, 정작 자신의 음악은 놓아버렸다.

목표는 인하대 후문의 먹자골목을 문화예술로 활성화시켜 문화의 거리로 만드는 것이었다. 한달에 두번 차량을 통제하고 거리공연을 올렸다. '문화가 없는 문화의 거리'에 문화를 얹기 위해서다. 하지만 상인들의 반발로 1년 6개월만에 활동이 중단됐다. 사전 협의와 활동의 취지를 충분히 상인들에게 전달하고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것이다.

# 사랑은 떠나고 빚은 남았다

처음 계획한 문화활동이 경험 부족으로 실패했지만 그는 골목에 문화의 옷을 입히기 위한 활동을 계속이어가고 싶어서 그곳에 카페, 찻집을 만들었다.

장사도 하면서 문화에 관심있는 친구들의 아지트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역시 큰 고민없이 시작한 무모한 장사였기에 이내 망하고 말았다. 2013년 말 준비해서 2015년 말 정리할 때까지 투자금 6000만원을 날렸다.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고 그만뒀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 두번째 쓴 맛을 안겨줬다. 장사를 하든지, 단체활동을 하든지 해야 했는데, 그 둘을 다 살려보려다가 실패했다.

'이거 어떻게 갚지?' 심리적 충격을 딛고 공모사업과 강사활동, 아르바이트 등으로 일부 빚은 갚았다. 그 때의 채무는 지금도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경제적 문제로 결혼을 약속한 여자와 헤어지는 아픔도 겪었다.

이어 또다시 추진한 프로젝트가 공유공간 팩토리얼이다. 인하대 후문 근처에 있던 폐시장 용일자유시장 내 버려진 공간에서 문화예술활동을 이어갔다. 2013년 거리울림을 처음 시작할 때 마을만들기 지원사업 일환으로 프리마켓을 운영하고 거리공연을 펼친 것이었다.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도시 안에서 마을 만들기, 마을공동체, 사회적 경제, 도시재생, 청년의 역할 등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뿔뿔이 흩어졌던 고민들이 발전해서 문화예술과 도시, 청년이라고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관심 키워드를 만들었습니다."

# 실패라는 '자산'에 기대를

"언제까지 거기 있을거냐, 얼른 서울가라! 인천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말을 수 없이 들었고, 실제, 주변 친구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마계 인천', 그것은 인천의 청년들이 처한 구조적 현실을 냉정하게 반영한 현실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 말일 것이다.

짧은 사회생활은 잇따른 실패의 연속이었다. 인생의 달콤한 맛보다는 쓴 맛에 익숙해 진 불안정한 '미생'의 삶이지만 '실패'라는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자긍심으로 생각한다. 지난 연말부터 문화단체 활동도 잠정 중단했다. 다시 되돌아 갈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약속은 했지만, 지금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다. 어쩜, 그는 안정적인 닻 없이 떠도는 대한민국의 많은 30대 중 한 사람에 불과할 수 있다.

그는 청년의 본질적 가치는 혁신적 가치의 생산자와 성장에 대한 기대감에 있다고 말한다. 더욱이 문화예술영역에서의 청년은 미래가치의 기대를 위한 투자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며, 복지차원이 아니라 사회보장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당대의 청년은 단언컨대, 사회적 약자입니다. 그러나 미래시대의 가능성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청년지원정책은 금전적 지원 등의 편협한 정책이 아니라, 교육·제도적 경험 등을 통한 보다 포괄적 형식이어야 하는 거죠. 그들이 '실패'를 경험할 수 있는 것 또한 투자의 개념으로 판단하고 이해하는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 문화·도시·청년 … 다음은?

백지훤씨는 본인이 '백수'라고 하지만 사실 학생이다.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한 그는 뒤늦게 논문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주제는 '시흥시 청년조례제정 과정에서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것이다. 시흥시 청년들이 전체 주민 2% 이상의 동의를 얻어서 발의한 청년조례 제정 과정을 기술하려고 한다. 그가 사회에 나와서 청년활동가로 일해 왔기에 자연스럽게 석사 학위 과정 논문의 주제로 결정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청년활동가로 일하면서 3가지 테마에 관심을 가졌다. 처음에는 문화예술분야였으며, 이어서 도시문제, 청년문제로 관심의 범위를 넓혀나갔다.

"희망이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다만, 더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어요. 지금껏 하고 싶은 걸 했습니다. '내 인생은 투쟁의 역사 같다'고 친구들에게 얘기하곤 해요. 늘 아니라고 하는 것들과 많이 싸웠고, 하지 말라는 걸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다 안된다는 걸 해봤더니 정말 안됐거든요. 이제 그 안되는 이유를 찾았고,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찾았습니다. 6년 정도 지나니까, 정리된 듯 합니다. 앞으로 좀 더 구체적인 실행을 준비할 계획입니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