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 시인·인천서예협회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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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양녕대군은 유유자적 산천경계를 휘돌며 풍류를 즐겨 정사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태종은 1418년 6월 폐위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그리고 두어 달 뒤 스스로 상왕으로 물러난 뒤 역사 속 최고의 성군인 세종이 탄생했다.
금년은 세종 즉위 600주년을 맞는 해이다. 백성이 곧 나라의 근본이라는 믿음 아래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 하려는 '민본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세종은 최선을 다해 정사를 돌봤다.
15세기 정치와 경제, 과학,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세종의 민본정신은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었다.

어쩌다 강의 중에 조선조 세종 시대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면 세대와 지역마다, 혹은 사회적 여건에 따라 청강자 의견은 분분했다. 세종의 정신에서 민주주의를, 인재 등용의 지혜를,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을 가장 뛰어난 덕목이었다고 말했다.
훈민정음, 자격루, 집현전, 1430년의 국민투표 등 세종이 백성들과 같이 이루어낸 성과들은 기록만으로 이어져 온 게 아니다. 우리 생활 속 문화유산에서도 그 흔적을 많이 느낄 수 있다. 앞으로 인천에 세워질 문자박물관에서도 잘 나타나겠지만, 서울 도심 속 경복궁에서도 볼 수 있다. 근정전과 사정전 등 검소하고 절약하며 민생을 안정시킬 책임과 의무를 강조한 명칭에서도 우리는 엿볼 수 있다.
유교이념 원칙에 따라 지은 경복궁을 적극 활용하고 사랑했던 세종의 고민은 다른 왕에 비해 덜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글 창제의 힘듦을 볼 수 있는 집현전(수정전)과 과학에도 심취했던 흠경각, 신하들과 소통하며 술을 곁들인 연회장 경회루, 왕자의 출산을 염원하며 소원왕후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지은 건순각 등은 세종의 인간적 면모를 잘 보여주는 발자취이다.
특히 세종의 '민본주의'에서 우러나온 소통과 포용, 화합은 이 시대에도 큰 교훈을 줌과 동시에 신분과 정파에 나눔 없이 인재를 등용하며 사람과 사람으로 백성(국민)을 사랑한 왕으로서의 덕목은 큰 가르침으로 남는다.
뜬금없는 '세종예찬'이 길어졌나 싶다. 하지만 넘쳐도 과함이 없는 세종에 대해 좀 더 말을 해봐도 싫증나지 않는다.

지난 달 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다. 장애인 문제는 따지고 보면 비장애인들이 만들어 냈다고 해도 그리 비난을 받을 일은 아닌 것 같다. 자신들의 욕심과 편리함, 체면 유지를 위해 소외시키거나 평등논리에서 제외시킨 게 아닌가 말이다.

세종실록에 명통시(明通侍)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절에 장님들이 초하루와 보름날에 모여 경을 외며 축수하는 곳이다. 국가가 주관하는 기우제에 경을 읊은 대가로 쌀을 30석씩을 하사했다. 처소를 잃지 말게 할 것이라는 내용과 수재와 한재가 있는 연도에는 잔질인(장애인을 과거에 부른 말)을 우선적으로 구제하되 조관(朝官)을 순행케 하고 여염 가운데 굶어 죽은 자가 있다면 중죄로 다스린다는 엄명이 기록되어 있다. 홀로 사는 장애인에게는 오늘날처럼 '도우미'를 국가가 제공하며 그 부양자에게는 부역도 면제했다.
국가가 장애인을 위한 관직을 별도로 두어 그들의 복지증진을 꾀한 세종은 명과학(운명, 길흉, 화복을 판단하는 학문)을 하는 장님 중 젊고 영리한 자 10인을 골라 서운관에 봉직케 했다. 장악원에는 시각장애인 악공을 두어 정기적으로 품계와 녹봉을 올려주었다.

고위관직에 장애인을 등용시킨 세종은 조선개국 후 네 명의 왕을 모시며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청백리 문경공 허조를 극찬한 바 있으니 조선 역대 임금 중 장애인 복지정책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이 아닐까 한다.
"내가 안질을 얻은 지 10년이 되었다"며 조회 등의 일정을 줄인다는 말을 남긴 세종. 그도 장애인이었기에 그토록 신경을 썼던 것일까.
세종의 업적 중 빼 놓을 수 없는 복지정책, 고정관념을 깬 장애의 역사 속에 성군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업적이 또 후세에 전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즉위 600년에 다시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