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한동민2.jpg
오랜 풍상을 견딘 노송들이 늘어선 멋진 풍경이 주는 느낌은 수원이 만만치 않은 도시임을 알려준다. 이정표와 같은 '노송지대'다. 그래서 예부터 수원은 '수(水)의 도시'이자 '수(樹)의 도시'라 일컬었다. 북쪽에서 수원으로 오는 길목의 지지대 고개를 넘으면 1번 국도가 이어진다. 넓혀진 현 경수산업도로가 아닌 예전의 1번 국도를 찾아 내려오면 늠름한 소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노송지대'라 이름 붙은 이곳은 1973년 7월 10일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는다. 역사적인 의미를 모른다 해도 멋지고 큰 소나무들이 길가에 줄지어 있는 풍광을 보면서 느끼는 감동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더욱이 그 소나무들이 정조 때부터 심었다는 사실을 알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정조 이후 1960년대까지 노송지대는 파장동 일부 지역이 아니라 수원으로 오는 길 자체였다. 아름드리 소나무로 이어진 길이 수원 시내를 관통하여 융·건릉까지 이어졌다. 1938년 조사에 따르면 장안문 밖에서 지지대에 이르는 큰 길가에는 500여 그루의 노송들이 건재했다. 1968년 사진을 보아도 대유평에서 만석거에 이르는 길가에 소나무들이 줄지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대유평의 북둔이 개발로 도시화하면서 노송들은 고사하거나 훼철되었고, 지지대 고개에서 이목동으로 내려오는 길가 소나무들만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제법 많이 남아 있었던 노송들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해 1973년 7월 장안구 이목동·파장동·송죽동 0일대 노송을 보호하고자 '노송지대'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보호하게 되었다.

오래된 큰 고을에는 수령의 선정과 덕을 칭송하며 세운 선정비를 만날 수 있다. 수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수령이 정치를 잘하여 누적된 폐단을 없애준 것을 백성과 아전들이 진정 고마워하며 떠나가는 수령을 위해 돈을 모아 조그만 비석을 세워주는 행위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일 수 있다. 그럼에도 조선 초기에는 폐단을 염려해 선정비를 세우는 것을 엄격히 막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종 이후 조금씩 세워지더니 숙종과 영조 대에 많이 세워졌다가 정조의 엄격한 조치로 한동안 뜸하더니 정조 이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순조 이후 조선후기 선정비가 대부분 세워지는데, 조선시대 전국적으로 1100개가 넘는 선정비 가운데 특히 고종과 대한제국기에 500여개의 선정비가 세워지는 말기적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나라가 망할 징조가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정 고을의 폐단을 없애고 선정을 베푼 수령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나라가 망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조선후기에는 부임하면서 이미 선정비를 세우려는 자들의 협잡과 모리배들의 아부로 만들어지는 공덕비는 백성들의 피눈물로 세워졌고, 현실과 괴리된 원망의 대상이었다. 수원의 선정비는 1629년 세워진 부사 이시백의 선정비부터 1901년 세운 이재극 선정비까지 37기가 남아 있다. 수원의 선정비는 사람들이 잘 보고 다닐 수 있도록 매교 구천동 비석거리와 세류동 윗버드내, 그리고 장안문 밖 수성중 사거리, 만석거 영화정 옆 등에 세워졌다. 이들 산재된 송덕비들은 도로확장과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노송지대로 이전되었는데, 1973년 노송지대가 경기도기념물로 지정되던 어간이었다. 이들 37기는 '수원역대목민관 송덕비군'이라는 이름으로 수원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1998년의 일이다.
매연 등으로 대기환경이 오염되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노송들이 점차 사라지자 길가 송덕비들을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2008년 10월 수원박물관이 개관하면서 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 수원시 향토유적보호위원회 의결에 따른 것으로 쾌적하고 안전한 수원박물관 야외에 이전·전시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화성박물관이 개관함에 따라 화성과 관련한 화성유수 공덕비 10기가 화성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야외 전시되고 있다. 새벽에 이들 공덕비를 뽑아다 창룡문 나대지에 방치했다가 옛 수원문화원 창고에 옮겼다는 소설같은 이야기가 유령처럼 신문에 떠돌고 있다. 문화재는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1970년대까지 노송지대 인근은 딸기밭과 포도밭으로 이름을 날렸고, 지지대 프랑스참전기념비 앞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화가들이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려주는 풍경을 만나곤 하였다. 지금의 노송지대가 문화적 향기가 뿜어나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해 본다. 노송지대만이 아니라 인근 지역이 함께 쾌적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