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려 무신정권의 등장
▲ 선원사지(인천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는 1976년 동국대 강화학술조사단이 발굴했는데 대형 주춧돌과 석축, 법자문과 연화문을 새겨 넣은 막새 등 유물이 나왔다. 선원사터는 산자락을 타고 5단의 석축으로 이뤄졌으며 '사적 제259호'로 1977년 지정됐다. 터 아래 지붕이 보이는 건물은 선원사로 1993년 11월26일 성원스님이 선원사터 아래 민가를 사서 지은 절이다. 매년 이 곳에선 팔만대장경 판각을 기념하는 대장경이운행사가 열렸으나 지금은 잠시 중단된 상태다. 봄을 맞는 선원사지가 누런 빛깔을 띠고 있다. 머잖아 저 땅에선 파릇파릇한 생명의 풀들이 겨우내 얼었다 녹기 시작한 땅을 뚫고 얼굴을 내밀 것이다.
▲ 선원사 주지 성원스님이 고려시대 차맷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8대왕 의종 - 문신들 방탕한 생활
차별받던 무신, 결국 1170년 정변

끝없는 권력다툼 점점 치열해지고
몸집 키우려 불법수탈 … 민중 봉기



누렇고 거무튀튀한 빛깔로 땅에 녹아 들어가는 겨울풀잎들. 겨우내 얼었다 이제 막 풀리기 시작한 땅을 뚫고 올라오는 푸른 잎새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생명은 '윤회'처럼 아름다운 소멸과 위대한 탄생을 반복한다.

3월 중순의 '선원사지'(禪源寺址)를 천천히 걸어 오른다. 쿠션처럼 푹신해진 초봄의 대지가 부드러운 숨을 내쉰다. 선원사지 앞 작은 사찰 '선원사'(주지 성원스님)에선 2명의 보살이 장독에 물을 뿌리고 있다. "간장 담그려구요." 커다란 돌부처님이 앉아 있는 다른 한 켠에선 터를 고르는 공사가 한창이다. 선원사는 지금 봄맞이 준비로 분주하다.

선원사지는 고려 무신정권의 수장 최우가 1245년 선원사란 절을 세웠던 자리다. 최우(최이)는 최충헌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23대 임금 고종을 앞세워 강화천도를 단행한 뒤 몽골제국에 맞서 싸우다 1249년 강화에서 눈을 감는다. 이때문에 최우의 무덤이 강화도 어디엔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 했다. 고려시대 최고의 청자로 알려진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역시 최우의 아들인 최항의 무덤이 있는 강화도에서 도굴됐던 보물이다.

고려 역사를 논할 때 늘 언급되는 사실이 100년간 이어진 무신정권이다. 최씨 무신정권이 가장 길게 이어갔지만 최초의 무신정변은 상장군 '정중부'로부터 시작한다.

고려 18대왕 의종은 1146년 왕위에 오른 뒤 문신·내시들과 함께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이어간다. 무신들의 역할은 향락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문신들의 경비를 서는 일이었다. 술 마시고 배설한 더러운 오물을 치우는 일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무신들은 결국 정중부에게 썩어빠진 문신들을 제거할 것을 요청한다. 잠시 망설이던 정중부는 초급장교 시절 젊은 문신으로부터 받은 수모를 떠올린 뒤 거사를 결심한다. 정중부의 수모란 인종 때 나라행사에서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촛불을 켜는 척하며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버린 사건이다.

1170년 정중부는 이의방, 이고 등과 함께 보현원(普賢院)에서 무신정변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한 뒤 권력을 장악한다. 한 세기를 이어간 무신정권의 탄생이었다. 보현원은 경기도 장단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곳으로 의종은 이 곳에 못을 만들고 가무를 즐기는 공간으로 이용했다.

정중부는 의종의 동생 익양공 호를 19대 임금으로 올리고 무신들의 회의기관인 '중방'에서 모든 일을 처리한다. 그렇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신들의 부패와 권력다툼이 발생한 것이다. 한편으로 무신들이 불법수탈자로 변하면서 곳곳에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났다.

천민집단인 '망이·망소이의 난'(1176년)과 같은 민란 등으로 나라가 혼란한 사이, 정중부의 권력은 청주 출신 청년 장수 경대승에게 넘어간다. 경대승이 30세에 요절하면서 이의민이 권력을 잡는데 비리와 부정부패가 심해 원성이 높았다. 그런 이의민을 제거한 사람이 최충헌이며, 이후 최씨 집안은 1196년~1258년 최충헌-최우-최항-최의로 이어지는 최장기 무신정권을 이어간다.

사실 무신정권 등장은 오래전 예고된 것이었다. 고려에선 호족이나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가 정계에 진출, 지배층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문벌귀족이 형성됐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이천의 호족 출신인 서필-서희-서눌의 집안과 같이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관리를 배출한 가문이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제와 음서제(특권신분층인 공신과 양반 등의 신분을 우대하고 유지하기 위해 후손을 관리로 뽑았던 제도)를 통해 주요 관직을 독식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른 귀족가문이나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그 지위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그 대표적 가문이 인주(인천) 이씨(경원 이씨라고도 함) 집안이다. 인주 이씨 가문은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80년 간 국가의 주요 관직을 차지한다.

인주 이씨 집안은 문학산 아래 조상의 묘를 쓰면서 번성했다고 전한다. 이자겸의 할아버지 이자연은 재상에 오르고 문종 선종 순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때까지 80년 동안 왕비를 배출하거나 7대 어향으로 큰 권력을 누렸다.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 이자겸은 예서 만족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다. 인종4년(1126)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반란은 그러나 실패한다.

이자겸의 난 이후 '묘청이 난'(1135)이 발생하는 등 고려의 정치체계는 점차 혼란에 휩싸였고 결국 무신정변을 예고하게 된다. 지금의 인천지하철역명이기도 한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 '원인재'는 인주 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의 후손들이 제를 지낼 때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선원사 주지 성원스님은 선원사가 현재의 터에서부터 신정리를 잇는 1.8㎞ 반경 안에 있는 거대한 사찰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선원사 박물관 안에 있는 차맷돌을 보여주며 "맷돌의 위 아래가 선원사지와 신정리에서 각각 발굴됐는데 꼭 들어맞는다"고 설명했다.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 선원사터에 섰다. 쑥향 가득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글·사진 김진국 논설위원 feebird@incheonilbo.com



[선원사지 한바퀴]

팔만대장경은 왜 해인사로 갔을까


선원사는 1245년(고종32년) 최우가 세운 국찰이다. 1246년 초대 주지로 임명된 진명국사 혼원은 승려 200명을 거느리고 1252년까지 선원사에서 정진한다. 1246년 고종임금이 선원사에 행차하자 최우는 칠보로 장식한 화려한 그릇에 음식 여섯 상을 차려냈다고 전한다. 고려 문인 최해의 문집인 <졸고천백>은 선원사가 송광사와 더불어 고려의 2대 사찰로 손꼽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기도 했다. 금붙이로 만든 불상만 500구가 모셔져 있는 사찰이 바로 선원사였다.

현재의 '선원사지'(인천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가 '사적 제259호'로 지정된 때는 1977년이다. 동국대 강화학술조사단이 1976년 터를 발굴한 이듬해 이 곳에선 대형 주춧돌과 석축이 발견됐다. 법자문과 연화문을 새겨 넣은 막새도 나왔다. 선원사터는 산자락을 타고 5단의 석축으로 이뤄졌다. 지금의 선원사는 지난 93년 11월26일 성원스님이 선원사터 아래 민가를 사 지은 절이다.

고려왕조가 1232년 강화로 도읍을 옮긴 이후 13년이 되던 해 최우는 선원사 건립을 주도한다. <고려사>는 당시 최고 권력자 최우가 팔만대장경을 위해 선원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최우는 팔만대장경이 거의 완성되던 1249년 죽었고 2년 뒤인 1251년 대장경은 완성된다.

이후 줄곧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되던 팔만대장경은 1398년 한양의 '지천사'로 옮겨진 뒤 해인사로 간다. 해인사로 간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대장경을 노리는 왜구(일본)나 오랑캐를 피해 남쪽 깊은 산 속으로 옮겼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그러나 유교를 국교로 삼으며 '숭유억불정책'을 펴던 조선이 대장경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현재 선원사 주지 성원스님은 지금의 선원사터가 대장경판당이었으며, 선원사 본원은 지금의 신정리 도감마을에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왕수봉 기자 8989king@ incheonilbo.com

인천일보·강화군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