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실 아주대 교수 (대학원 교육학과장)
인간은 본디 즐거움을 희구하는'유희적 존재'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인류는 어울려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고, 또 그 속에서 그리스의 아고라처럼 배움과 토론과 웅변의 향연을 즐기곤 했다. 그 속에 고대 학교의 정겨운 원형도 발견되곤 한다. 삼국유사에도 전해지듯, 삼한의 사람들은 제천의식을 축제로 삼아 그 속에서 모두가 함께 했고, 온 몸으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높낮이 없이' 즐거운 공동체를 일구어내곤 했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팀의 '2018 트랜드'에 따르면 요란하게 큰 행복보다 내 앞에 마주한 작은 행복,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인 '소확행'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워라벨', 가성비보다 더 소중한 마음의 만족과 행복을 뜻하는'가심비' 등등….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저울을 행복 쪽으로 살짝 기울여 주는 희망의 증후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포리아처럼 퇴로도 없이 꽉 막힌 막다른 길에서 현대인들은 답답한 생존의 굴레 속에 갇혀 버리는 불안함으로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그런 그들이 요즘 공부하는 즐거움, 책 읽는 기쁨에 푹 빠져 있다. 출구를 찾아가고 있다. 먹고 살기만도 벅차고 힘든 세상, 숨 가쁘게 헉헉대며 쫓기듯 살아가는 삶 속에서, 도통 읽힐 것 같지도 않고, 팔리지는 더더욱 않을 것 같은 수많은 인문학 책들을 앞다퉈 빌려보고 사 본다. 도서관 대출이 부쩍 늘고 판매고도 치솟는다. '반전'이 아닐 수 없다. 각자 도생의 시대에 '공부'에서 삶의 이유와 인생의 묘약을 찾고 있는 이들이 늘고 있다.

거리 곳곳에 늘고 있는 길거리 학습관과 도서관에서 늦은 시간까지 불을 밝히며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사람들, 대형서점 100인의 책상을 빼곡히 메우고 책 읽는 즐거움에 마냥 행복해 하는 사람들로 올 봄이 유달리 신선하다. 마을 곳곳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우리동네 학습공간, 마을학교, 행복학습센터들, 그 곳에서 전해지는 배움의 향기가 초봄의 푸릇한 꽃향기보다 더 향긋하다. 그래서인가. 세상이 제법 살아봄 직한 '희망'으로 다가온다.
이스라엘의 석학 '사피엔스' 저자 유발 하리리가 예견하듯, 인공지능과 로봇이 어느 새 인간을 대체하여 또 다른 세상의 주인이 되어 가는 놀라운 세상,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것이 순간 연결되는 광속의 세상이 우리 앞에 와 있다. 현생 인류는 2100년 무렵 다 사라져 없어질 것이라는 충격적 예언도 서슴지 않는 그가 '호모데우스'에서 다시금 인간 존재를 일깨워 준다.

4차산업혁명을 핵심의제로 삼아 미래 항로를 열었던 융합의 산실(産室) '다보스 포럼'에 세계적 경제 석학들이 매년 모인다. 미래를 살아가는 법과 인공지능 위력을 심각하게 논의하던 그들이 놀랍게도 '인간만세'를 외쳤다. '어떤 인간도 기계를 이길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기계도 그들을 만들고 갖고 있는 주인인 인간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결론과 함께 인간다움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자못 공감이 간다. 어떤 세상이 와도 여전히 답은 '사람'이라고,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대단한 희망의 존재임을 발견하게 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답답한 일상을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 그러나 그들조차 삶의 즐거움에 대한 희구(希求)를 내려놓아 본 적은 없다. 때론 '돈의 보상'보다 진정 그들이 좋아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소확행'의 삶을 당당하게 선택한다. 즐겁지도 않은 반복적 일에 묻혀 살아가던 '호모 파베르'들에게, 오래 전 그들의 곁을 훌쩍 떠났던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가 돌아왔다. 덕분에 다시 즐거워질 삶을 기대하며 그들이 지금 마냥 설레고 있다.
어느 장인(匠人)에게 '왜' 한평생을 그 일만 하며 살았냐고 물었다. 그의 답은 아주 간단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이 일이 아주 즐겁고 좋아서 멈출 수 없었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겠노라는 답이었다. 미소를 띤 그에게서 '삶의 격(格)'이 물씬 풍겨나는 듯 했다. 향나무는 자신을 찍은 도끼에게 마저 향을 묻힌다고 했다. '뽑으려' 하니 모두 잡초이고, '품으려' 하니 모두가 '꽃'이더라는 말이 오늘 따라 유독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세상, 오랜만에 우리 곁에 돌아와 준 '호모 루덴스'를 반기며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