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주간
악몽을 또 꾸었다. 끝도 모를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꿈이었다. "이젠 꾸지 말아야지"라고 다잡아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저 그냥 꿔지니 어쩌란 말이냐. 한숨만 깊게 내쉴 뿐이다.
"스멀스멀 검은 손이 온몸을 더듬으면서 사악한 눈빛을 보낸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지만, 몸은 자꾸 검은 손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 여기서 포기를 해야만 하는가. 용을 써가며 몸부림을 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흉측한 힘이 지배하는 통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우니, 고통스럽기만 하다. 만사가 엉망진창으로 변해간다."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깬다. 으스스 몸을 한 차례 떨고, 한참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아, 언제쯤 이런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억장이 무너진다. 괜스레 눈물이 앞을 가린다. 거지발싸개 같은 이들은 참으로 끈질기기도 하다. 이를 앙 다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이미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쳤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 춘삼월(春三月), 상큼한 계절은 왔어도 아직 마음은 겨울처럼 스산하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마음과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으니, 온전한 생활을 하기는 그른 것 같다. 그래도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다독거리며 추슬러 보려고 애를 쓴다.
우리는 때론 현실과 부딪히며 머리 터져라 싸우기도 하고, 때론 험한 꼴을 당해 악몽 속에서 진저리를 치기도 한다. 비관을 넘어 스스로 비극적인 삶에 빠지기도 한다. 세상에서 버림을 받거나, 핍박을 당하면서 정말 소외됐다는 생각에 좀처럼 아득한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하나, 봄은 오고야 만다. 지금 봄은 온누리에 매무새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 기운을 한껏 드리우고 있다. 곳곳에 아지랑이는 몽실몽실 피어 오르고, 꽃망울마다 막 터뜨릴 채비를 서두른다. 겨우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견딘 봄이 반갑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왜 이제야 오느냐고. 왜 기다리는 마음을 몰라 주느냐고….
소생(蘇生). 그렇다. 봄은 만물의 소생을 아우른다. 새로 깨어나게 만들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봄은 부활(復活)처럼 저 편에서부터 이미 돌아오고 살아야 할 의미를 알려주었다. 보이는 것마다 "새롭게 하소서"라는 얘기를 하는 듯하다. 결국 봄은 우리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넘어지지 않는 삶은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다 몹시 아파하면서 이승에서의 생활을 꾸려간다. 갖은 고난을 헤치고 겪으며 지내야 한다. 고진감래(苦盡甘來)를 떠올리면서, 그래도 '멋진 세상'을 한 번 봐야겠다는 의지를 품고 말이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비시 셀리(Percy Bysshe Shelley)가 '서풍의 노래'에서 읊은 시구(詩句)다. 인생은 기다림의 시간임을 일깨운 시다. 시련 뒤에 찾아오는 희망을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구절을 시간의 흐름에 의한 철의 변화보다는 힘겨움을 참고 이겨낼 자기 의지로서 애송한다. 셸리 시에서도 보듯, 봄은 단지 계절의 순환에 따라 겨울이 지난 뒤 찾아오는 자연을 의미하지 않는다. 겨울은 인간을 억압하는 온갖 사악한 힘을, 봄은 흐드러진 자유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뜻이다. 그러면 '혹한의 겨울'을 이겨내는 슬기로운 방법은 무엇일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지난 일에 파묻혀 지내는 삶은 불행하다. 과거에 매달려 인생을 허비하지 말았으면 싶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내버려 두어라'(Let bygones be bygones)라는 영국 속담이 전해온다. 아무리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도 훈풍을 가져오는 봄을 이길 수는 없다. 설령 지난 날에는 외롭고 슬프고 고통스러웠을지라도,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면 분명 '좋은 날'을 마주할 터이다. 믿자. 믿음은 거룩하다고 여기지 않더냐. '여기 지금'(Here and Now) 이외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열심히 오늘을 살아가면 어떨까.